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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0(중종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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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7(선조 30)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의 장수. 임진왜란 때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정유재란 때는 수군통제사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남해 일대에서 항전했다.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은 이순신의 지원을 받아 옥포 등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옥포해전에 대한 공으로 조정에서 이순신보다 1품계 아래의 관직을 내리면서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이후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었다가 이순신의 파직과 투옥 후에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칠천량에서 삼도수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대패했다. 사후 두 차례 전쟁의 공을 인정받아 1등 공신으로 책정되었다.
조선의 무관. 본관은 원주.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가 되어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령부사로 승진했으며, 이어 종성부사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동래에 부임했을 때 전선은 7, 8척뿐이고 전쟁장비는 물론 수군의 기강도 흩어져 있자, 주변의 사천·고성·곤양 등지를 돌며 수군모집과 정비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월 14일 박홍이 이끄는 경상좌수영군이 일본군과의 교전도 없이 궤멸되었으며, 그가 관할하는 경상우수영의 장병들도 대부분 흩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남해 일대에서 20여 일 동안 활동하며 적선 10여 척을 부수었다. 5월 2일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은 이순신이 지원하자 5월 7일 합동하여 옥포 등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이순신·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합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율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해전에 참전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옥포해전에 대한 공으로 조정에서 이순신에게는 자헌대부를, 그에게는 1품계 아래인 가선대부를 내리면서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으며, 1593년 8월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이순신이 임명되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는 1594년 충청병사, 얼마 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임되었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수사로 재임명하자는 논의가 있던 중 1597년 1월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었고, 2월에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라좌도수군절도사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은 일본이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어 병력을 총집결하여 재침입하자 칠천량에서 삼도수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대패했고, 전라우도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부터 칠천량해전까지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워 1604년 이순신·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되고 원릉군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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