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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륙회의가 1775년 5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을 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2만 명 남짓한 아메리카군을 지휘할 총사령관을 뽑는 것이었다.
6월 15일 워싱턴이 총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능력과 명성에서 그만한 인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거래의 결과였다. 뉴잉글랜드가 버지니아의 보호를 약속받는 대가로 총사령관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그는 총사령관이 되자마자 특유의 결단력과 정력을 발휘해 지원병을 조직하고 식량과 탄약을 모았다(미국독립전쟁).
그는 1776년 3월 4일 밤에 보스턴 시가지와 항구가 내려다보는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고, 타이콘더로가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들을 배치했다(보스턴 포위전). 영국 해군사령관은 혁명군을 그 요새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보스턴 항구에 머물 수 없다고 선언했으나,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장군은 3월 17일 보스턴에서 철수했다.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낸 뒤 워싱턴은 뉴욕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남쪽으로 달려갔다.
첫 대결에서는 워싱턴이 승리했지만, 혁명군은 그후 5년 동안 패배를 거듭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전략가는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자주 실수를 저질렀고, 1776년의 롱아일랜드 전투에서는 군대 전체가 포로로 잡힐 뻔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결점은 자신의 판단보다 휘하 장군들의 판단을 더 존중하는 경향이었다.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을 때면 항상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그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담하고 저돌적이었지만,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소극적인 지연 전술을 자주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강인한 성격에다 군인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으며, 정력적 활동과 풍부한 상식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워싱턴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규율에 엄격했다는 점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혁명군 병사들은 걸핏하면 병에 걸렸고, 탈영할 기회만 노리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세 지역에서 모인 병사들은 서로 경계하고 시기했다. 워싱턴은 비겁하고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한 병사들을 엄하게 징계하는 한편, 병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대륙회의에 요구하여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76년 4월 이즈리얼 퍼트넘이 지휘하는 약 9,000명의 병력을 롱아일랜드의 브루클린 고지에 배치했다. 이곳은 이스트 강의 영국 함대에게 퇴로를 끊길 수도 있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는 독립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대륙회의에 참석하느라 5월 필라델피아에서 2주일을 보낸 뒤, 하우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영국군은 스테이튼 섬에 진을 치고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뒤, 1776년 8월 22일 그레이브젠드 만을 건너 롱아일랜드에 상륙했다. 4일 뒤 하우 장군은 동생인 리처드 하우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뉴욕 시로 보내어 양동 작전을 펴면서, 방비가 허술한 혁명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하우 장군은 혁명군 진지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꾸물거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그 틈을 타서 워싱턴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이스트 강을 건너 맨해튼으로 옮겨갔고, 영국군은 맨해튼 섬의 저지대에 기습 상륙하여 혁명군을 몰아냈다.
워싱턴은 여러 번 포로로 잡힐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허드슨 강 연안에 있는 요새 2개를 빼앗겼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수천 명의 병력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뉴저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델라웨어로 후퇴하는 동안 병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영국에 대한 무력 저항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에게는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워싱턴은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두어, 아메리카의 희망과 활력을 되살렸다(트렌턴과 프린스턴 전투). 델라웨어 서쪽에 진을 친 워싱턴은 남은 병력 6,000명을 총동원하여 트렌턴과 프린스턴을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양쪽 날개를 맡은 부하들이 그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워싱턴은 1776년 12월 25일 밤에 약 2,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트렌턴으로 진군했다. 그는 헤센 출신의 독일 용병부대를 기습하여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용병대장 요한 랄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콘월리스 장군이 8,000명을 이끌고 트렌턴으로 달려왔지만, 워싱턴은 콘월리스와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늙은 여우를 잡기'로 결정했다.
밤새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길은 꽁꽁 얼어붙었다.
진지를 몰래 빠져나온 워싱턴은 콘월리스 부대 뒤로 우회하여, 새벽에 프린스턴에 있는 영국군 3개 연대를 기습했다. 영국군은 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으며, 워싱턴은 많은 전리품을 갖고 뉴저지의 모리스타운에 있는 진지로 개선했다. 이 승리는 모든 아메리카인과 외국 동조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봄에는 지원병들이 혁명군 진지로 몰려왔다.
1777년은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영국의 존 버고인 장군이 새러토가에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에게 투항한 해였다.
필라델피아가 점령되자 대륙회의는 펜실베이니아 내륙으로 피난했고, 저먼타운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을 기습하려다가 실패한 워싱턴은 밸리포지에서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맨발에 거의 벌거벗은 상태인 혁명군은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게다가 일반 대중은 날로 비난의 소리를 높였고, 대륙회의는 그를 변변히 지원하지도 못하면서 공연한 트집을 잡곤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워싱턴은 겨울 내내 밸리포지를 고수했다.
워싱턴의 정적들은 그가 가장 허약해진 이 순간을 노려 그에 대한 적개심을 배출시켰다. 아일랜드계로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다가 혁명군 감찰 장관이 된 토머스 콘웨이는 토머스 미플린, 찰스 리, 벤저민 러시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워싱턴을 총사령관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 음모에 동조한 대륙회의의 일파는 전쟁 위원회를 개편하여 워싱턴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다. 전쟁 위원회 의장은 게이츠 장군이 맡았고, 그의 참모장인 제임스 윌킨슨이 간사가 되었다. 워싱턴은 대륙회의 내의 적개심을 잘 알고 있었고, 매사추세츠의 벤저민 러시와 제임스 로벨이 퍼뜨리는 중상모략, 영국 첩자들이 아메리카 언론에 발표한 날조기사, 북부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남부의 버지니아 출신인 그에게 품고 있는 시기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1777년 11월 9일 사건 전모를 알고 있다는 서신을 윌킨슨에게 띄움으로써 콘웨이 일당의 음모를 무산시켰다.
1778년 봄 아메리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결과 전쟁의 양상은 급변했다.
필라델피아에 주둔한 영국군은 프랑스 함대에 봉쇄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뉴욕 시로 철수했다. 워싱턴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6개 여단을 이끌고 서둘러 진격하여, 6월말에 헨리 클린턴(하우 장군의 후임자) 부대 주둔 지역과 저지 해안 사이에 도착했다. 그결과 6월 28일에 몬머스 전투가 벌어졌다(몬머스코트하우스 전투). 워싱턴은 빈틈없는 전략을 세워 공격했지만, 느닷없이 후퇴 명령을 내린 찰스 리의 배신 때문에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1778년 7월에 샤를 엑토르 에스탱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자 클린턴이 이끄는 영국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결정타는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를 사로잡은 것이었다(요크타운 포위전). 1780년 드 로샹보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도착하자, 워싱턴은 남부에 있는 콘월리스나 뉴욕의 클린턴에 대한 공격을 도와달라고 프랑스 해군 제독 드 그라스에게 요구했다.
8월에 프랑스 제독은 체서피크 만이 작전 지역으로 더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로부터 1주일도 지나기 전인 1781년 8월 19일 위싱턴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델라웨어 만에서 배를 타고 9월 14일 버지니아 주 윌리엄스버그에 상륙했다. 콘월리스는 7,000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요크타운으로 후퇴하여 참호를 팠다. 워싱턴이 지휘하는 연합군(5,500명의 혁명군, 3,500명의 버지니아 민병대, 5,000명의 프랑스 정규군으로 이루어짐)은 맹렬한 포위 공격을 퍼부었고,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항복했다.
워싱턴의 통솔력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전투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워싱턴은 1781~82년 겨울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에 참석했고, 1783년 4월 허드슨 강 연안의 뉴버러에 있는 사령부로 돌아왔다. 혁명군은 클린턴이 뉴욕에서 철수한 1783년 11월 25일 뉴욕에 개선했다. 워싱턴은 12월 4일 측근 장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12월 23일 아나폴리스에 있는 메릴랜드 상원에서 대륙회의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2월 24일 새벽에 아나폴리스를 떠나 밤이 되기 전에 마운트버넌의 집에 도착했다. 그후 4년 동안 워싱턴은 자신의 영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전쟁 때문에 그는 땅을 돌보지 못했고 수출이 중단되었으며 지폐 가치의 하락 때문에 모두 3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재산을 복구하는 데 성공하여, 영지에서 매년 들어오는 수입이 1만 달러 내지 1만 5,000달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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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미국독립전쟁 아메리카 혁명군 총사령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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