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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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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34(덕종 3) |
국적 | 고려, 한국 |
요약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 본래의 성은 이(李), 초명은 자림(子琳). 덕종의 비인 경목현비(敬穆賢妃)의 아버지이다.
성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를 거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가 되었다. 1014년(현종 5) 경군영업전(京軍永業田)을 몰수하여 백관녹봉(百官祿俸)에 충당하는 데 불만을 품은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개경의 사저(私邸)에 있던 그는 왕의 측근 김맹(金猛)을 통하여 무신들을 제거할 뜻을 왕에게 알리고,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이 되어 준비를 했다. 이듬해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들과 향연을 할 때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김훈·최질 등 19명을 죽였다. 1020년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경주에 가서 고선사(高僊寺)의 금라가사(金羅袈裟)와 불정골(佛頂骨), 창림사(昌林寺)의 불아(佛牙)를 가져와 내전에 보관했다. 1022년 동지중추사(同知中樞事)를 거쳐 중추사국자좨주(中樞使國子祭酒)·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치성공신(致盛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027년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29년 이응보(李膺甫)·황보유의(皇甫兪義)·황주량(黃周亮) 등과 더불어 개경의 나성을 쌓는 데 참여한 공으로 검교태위 행이부상서 겸 태자소사 참지정사 상주국 개성현개국백 식읍칠천호(檢校太尉行吏部尙書兼太子少師參知政事上柱國開城縣開國伯食邑七千戶)에 봉해지고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이 되었다. 또한 왕씨가 사성(賜姓)되고 개성현의 장전(庄田)이 주어졌으며, 처 김씨도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에 봉해졌다. 1030년 내사시랑 판삼사사(內史侍郞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딸을 납비하고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이때 요나라 성종(聖宗)이 죽고 흥종(興宗)이 즉위했으므로 장례에 참석하고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을 각각 보내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압록강의 성과 다리를 허물고 억류된 우리 사신을 돌려줄 것을 청하여 듣지 않으면 절교하자고 건의했으며, 요가 이에 응하지 않자 강경책을 주장하여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게 했다. 한편 유소(柳韶)가 거란의 성을 공격할 것을 청하자 이단(李端)과 함께 출병을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 고향인 청주로 내려가 요양하다가 3년 만에 죽었다. 유소·이단 등과 함께 적극적인 북진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몰락 후 보수 세력의 문신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이 추증되었고,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영숙(英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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