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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타일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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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381년에 부과된 인두세였는데 이에 대한 원성이 높아 14세기 중반부터 차츰 쌓이던 경제적 불만이 마침내 극에 달했다. 반란은 몇몇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는데 빈민뿐만 아니라 부유한 장인과 예농들도 그에 가담했다.
농업 노동자들과 도시 노동자 계급은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노동력이 부족하자 최고임금을 고정시키기 위해 제정한 노동조례(1351)에 가장 큰 불만을 품었던 것 같다. 봉기는 잉글랜드 남동부지방과 이스트앵글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다른 지역에서도 소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반란은 1개월도 지속되지 못했으며 사회혁명이라는 면에서 볼 때 완전한 실패였다. 그러나 이 반란 후 정부는 더 이상 인두세를 걷지 않았으므로 과세에 대한 빈민층의 저항으로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381년에 부과된 인두세였는데 이에 대한 원성이 높아 14세기 중반부터 차츰 쌓이던 경제적 불만이 마침내 극에 달했다. 반란은 몇몇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는데 빈민뿐만 아니라 부유한 장인과 예농들도 그에 가담했다. 농업 노동자들과 도시 노동자 계급은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노동력이 부족하자 최고임금을 고정시키기 위해 제정한 노동조례(Statute of Labourers : 1351)에 가장 큰 불만을 품었던 것 같다.

봉기는 잉글랜드 남동부지방과 이스트앵글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다른 지역에서도 소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1381년 5월 에식스에서 시작된 반란은 어린 왕 리처드 2세의 정부에 갑작스러운 타격을 입혔다. 6월에는 에식스와 켄트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다.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켄트인들은 6월 13일 런던에 들어가 플랑드르 상인들을 학살하고 왕의 삼촌이자 원성의 대상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저택을 파괴했다(→ 타일러).

정부는 할 수 없이 협상을 해야만 했다. 6월 14일 왕은 런던 교외 마일엔드에서 에식스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농토를 싸게 공급할 것과 자유로운 거래, 농노제 및 강제노동 철폐를 약속했다. 왕이 런던을 떠나 있는 동안 런던에 있던 켄트의 반란군은 런던 탑을 장악하고 인두세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법관이자 대주교인 서드베리의 사이먼과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경을 참수했다. 이튿날 왕은 스미스필드에서 타일러와 켄트인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타일러는 격노한 런던 시장에게 살해되었다. 왕은 반란군 앞에서 군주로서 위엄 있게 호소하고 개혁을 약속한 뒤 해산하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런던에서는 위기를 넘겼으나 지방에서는 그뒤 몇 주 동안 반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해 6월 25일경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노위치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가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존 리처의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마침내 반란은 끝났다. 반란은 1개월도 지속되지 못했으며 사회혁명이라는 면에서 볼 때 완전한 실패였다. 마일엔드와 스미스필드에서 왕이 한 약속은 시행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장원제도에 불만을 품고 계속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 후 정부는 더이상 인두세를 걷지 않았으므로 과세에 대한 빈민층의 저항으로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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