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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요르단 강 유역 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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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2,000명 (2014 추계) |
면적 | 45㎢ |
언어 | 아랍어 |
대륙 | 중동 |
국가 | 팔레스타인 |
요약
요르단 강 유역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성서 역사에서 예리코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요르단 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공격한 도시로 유명하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에게 무너진 뒤 BC 9세기 베델 사람 히엘이 재건할 때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밖에도 <구약성서>, <신약성서>에 여러 차례 언급된다. 헤로데 대왕이 겨울 궁전을 세우고 BC 4년에 죽은 곳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로마 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에서 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지점에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는 주변 평야 위에 약 21m 높이로 솟은 탈앗술탄이라는 작은 산 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요르단 강 유역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성서 역사에서 예리코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요르단 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공격한 도시로 유명하다(여호 6).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에게 무너진 뒤 BC 9세기 베델 사람 히엘이 재건할 때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I 열왕 16 : 34). 그밖에도 〈구약성서〉·〈신약성서〉에 여러 차례 언급된다.
헤로데 대왕이 겨울 궁전을 세우고 BC 4년에 죽은 곳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로마 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에서 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지점에 있다. 헤로데 대왕이 겨울 궁전을 세우고 BC 4년에 죽은 곳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로마 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에서 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지점에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는 주변 평야 위에 약 21m 높이로 솟은 탈앗술탄(수량이 풍부한 앗술탄 샘의 수원이 있음)이라는 작은 산 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 대해 여러 차례 중요한 고고학적인 탐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에 1952~58년 예루살렘 소재 영국고고학연구소 소장 캐슬린 M. 케니언이 이끈 탐사가 유명하다.
탐사의 주요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인들이 예리코를 파괴한 연대를 확정짓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가나안 점령 연대기를 작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한때 이 파괴의 증거가 발견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것은 잘못된 감정인 것으로 밝혀졌다. 도시 주위를 둘러싼 성벽 전체를 비롯해서 그무렵의 도시 대부분이 침식작용으로 사라졌으며, 그 시대에 도시가 있었다는 증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도시는 BC 14세기 후반에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시기를 확인하기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이 도시의 터는 그후 철기시대가 될 때까지 버려졌다. BC 9세기에 히엘이 살았던 자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BC 7세기에 상당히 큰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취락은 BC 586년 제2차 바빌론 포로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곳에 예리코들이 생겼다.
그러나 예리코가 성서시대보다 훨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이 발굴작업의 결과 밝혀졌는데, 그 유적이 큰 중요성을 띠는 이유는 영구 취락의 최초의 발전에 관한 증거와 문명으로 이행하는 첫 단계의 증거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탄소동위원소법에 의해 BC 9000년경으로 측정된 먼 옛날에 중석기의 수렵민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후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착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BC 8000년경에는 주민들이 마을 주위에 거대한 돌로 벽을 두르거나, 적어도 어느 한 곳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거대한 돌탑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조직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마을은 도시라는 용어에 걸맞게 규모가 컸으며, 주민은 약 2,000~3,000명에 이른 듯하다.
이 1,000년 동안에 생활방식은 수렵생활에서 완전한 정착생활로 발전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농업이 발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며, 재배종의 밀과 보리의 낱알들이 발견됨으로써 농업 발달의 증거를 제공하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충분한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개시설을 고안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팔레스타인 최초의 신석기 문화는 순전히 독자적으로 발전한 토착 문화였다. 이 토착의 신석기시대 주민들에 이어 BC 7000년경 2번째 집단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 집단은 토착적이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의 특징을 지니고 아직 토기제작 단계에 이르지 않은 문명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들의 예리코 점거는 분명 농업에 기초한 신석기 생활양식이 발달해 있는 시리아 북부의 다른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새로운 집단이 내도했음을 알리는 것이다(중석기시대, 예리코의 벽).
이 신석기시대 제2기는 BC 6000년경에 끝났다. 이후 1,000년 동안 예리코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생활한 증거가 거의 없다. BC 5000년경부터 비로소 예리코에는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영향을 받은 증거가 나타난다. 이 시기도 여전히 신석기시대에 속하나, 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 북부지역에 마을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예리코 최초의 도기 사용자들은 그 선조들에 비해 오히려 더 원시적이었으며, 땅을 파서 지은 단순한 오두막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주로 목축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2,000년 동안 정착인구는 아주 적었으며 때때로 정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BC 4000년대말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같이 예리코에도 도시문화가 나타나 성곽도시가 되었으며, 성벽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BC 2300년경 도시문화는 다시 중단되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집단으로 형성된 유목민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모리족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뒤를 이어 BC 1900년경에 거주한 집단은 가나안족으로 지중해 연안 전역에서 발견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도시생활 양식을 다시 들여왔다. 가나안족의 집과 가구는 유적 발굴작업을 통해 드러났으며, 가구는 죽은 사람이 사후에 쓰도록 무덤 속에 넣었던 유물이었다. 이 발견들은 이스라엘인이 가나안을 침입했을 때 그들이 접하고 대부분 받아들였던 문화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1950~51년에 발굴된 유적을 통해 헤로데 시대의 예리코 가운데 일부가 드러났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에서 남쪽으로 1.6㎞ 떨어진 와디 알쿨트에 있는 웅장한 건물의 정면은 헤로데 궁전의 일부인 듯하며, 궁전양식은 완전한 이탈리아식으로 헤로데가 얼마나 로마를 선호했는가를 나타내준다. 로마 시대 예리코의 중심지가 된 이 지역에서는 아름다운 건물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시기의 예리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리코에서 동쪽으로 1.6㎞ 떨어진 제3의 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으로부터 오늘날의 도시가 생겨났다.
투르크 지배 당시에는 보잘것없는 마을이었으나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난 후 겨울 휴양지로 성장했다(1922). 그러나 도시의 팽창은 주로 1949년 요르단에 합병된 후에 이루어졌다. 부근 지역에 이스라엘에서 온 아랍인 난민수용소가 세워짐으로써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다시 건설되었다. 오아시스 지역은 관개시설을 통해 크게 확장되었다.
1967년 6월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주민 대다수가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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