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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 이래로 그는 인근의 라고스 항구에서 탐험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탐험대는 처음에는 모로코의 대서양 해안지대를 더 많이 탐사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후 그가 대륙들과 연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인도로 가는 남쪽 항로를 발견해 인도에 그리스도교를 소개하고 통상을 진흥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1420년대 왕자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두아르테와 페드루는 모두 결혼했으나 엔리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433년 두아르테가 주앙 왕을 계승했을 때 그는 엔리케의 낭비벽과 무질서한 습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 자금조달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는 것 등의 결함을 들어 거리낌없이 훈계와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비난은 전통적으로 항해왕자 엔리케에 대해 종교와 발견사업 말고는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 고상하고 금욕적인 인물로 이야기해온 것과 맞지 않는다.
엔리케는 또한 그보다 더 총명했던 것으로 보이는 형 페드루 왕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1425년에 페드루는 오랫동안 유럽 여행을 떠나 잉글랜드·플랑드르·독일·헝가리·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공국들(지금의 루마니아)을 방문하고 이탈리아와 아라곤, 카스티야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동유럽에서 그는 오스만 투르크를 가까이 접하면서 이슬람교도들의 위협을 실감했다. 이 여행으로 그는 지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며 원거리 여행을 떠나는 대부분의 유럽인 여행자들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에서 그런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탈리아로부터 페드루는 1428년에 마르코 폴로 여행기의 사본을 포르투갈로 가져와 엔리케 왕자를 위해 번역을 해주었다. 형 두아르테가 왕위에 있던 5년 동안 엔리케는 자기 휘하의 선장들을 설득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더 아래쪽으로 탐험해가도록 했다.
이 탐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434년 질 에아네스가 선원들의 발을 묶어왔던 미신을 깨고 보자도르 곶을 돌아서 항해한 것이었다. 이후 몇 년 간 엔리케 휘하의 선장들은 남쪽으로 리우데오루 강 조금 너머까지 밀고내려갔다. 그들은 또한 엔리케와 페드루 두 사람의 명령을 받고 최근에 발견한 아조레스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1437년에 엔리케와 그의 동생 페르난두는 두아르테의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 탕헤르 정복을 위한 원정을 떠났다.
세우타가 포르투갈에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접도시를 확보하면 세우타의 안전을 보장할 뿐 아니라 새로운 수입원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페드루는 그것이 포르투갈의 진정한 사명인 발견사업의 계속적인 수행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보고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리케와 페르난두는 탕헤르를 공격했다가 대실패를 겪었다. 엔리케는 지휘능력이 보잘것없었으며 원정사업을 잘못 이끌었다.
페르난두가 볼모로 남지 않았다면 포르투갈 군대는 다시 배를 탈 수도 없을 뻔했다. 엔리케는 자신이 볼모로 남겠다고 제안했으나 포르투갈군이 지휘관을 잃는 것에 반대했기에 페르난두가 포로로 남았다가 이후 1443년 학대받던 끝에 페스에서 죽었다.
두아르테 왕은 1438년 엔리케가 돌아오기 직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폰수 5세는 당시 6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페드루가 섭정을 맡았으나 소년왕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레오노르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시숙인 페드루를 증오하는 한편 엔리케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엔리케는 포르투갈 통치를 맡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며 가문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 애썼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페드루가 섭정을 맡는 것에 만족했으며 자신은 사그레스로 돌아가 해상탐험을 재개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황태후가 포르투갈을 떠남으로써 문제가 다소 가라앉자 이후 페드루와 엔리케는 화목하게 지냈다. 그러나 서자 출신인 그들의 이복동생 바르셀로스 백작 아폰수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지위가 낮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목을 조장했다.
이 시기에 엔리케의 발견사업은 섭정의 격려와 조력을 받아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그의 당면목표 중 하나는 포르투갈의 경제력을 강화하고 항해 비용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금광을 발견하는 것이었다(그는 세우타의 무어족에게서 금광의 존재를 알아낸 것으로 보임). 1441년에 범선 하나가 약간의 사금가루와 노예들을 싣고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돌아오자 엔리케가 소득 없는 사업에 돈을 낭비하고 있다며 점점 커지던 비난이 잠잠해졌다. 엔리케 휘하의 항해사 중 한 사람인 디니스 디아스는 1445년에 세네갈 강(당시에는 나일 강의 지류로 여겨졌음) 하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또다른 엔리케 휘하의 선장인 누뉴 트리스탕이 감비아 강을 찾아냈다. 1448년에 이르러 포르투갈로의 노예무역이 확대되자 엔리케는 아르긴 섬에 요새와 창고를 짓도록 명령했다. 이 시설은 해외에 설립된 유럽 최초의 무역기지였다.
아폰수 5세는 1446년 14세의 나이에 법적인 성년이 되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동안 카스티야에서 죽었고 젊은 왕은 당시 페드루의 딸 이사벨과 결혼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섭정과 왕의 관계는 나빴다. 바르셀로스의 아폰수는 이제 소년 왕의 예민한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미 연약함이 드러난 소년 왕에게 전권을 인계하는 것을 페드루가 눈에 띄게 꺼려했기 때문에 그의 목적은 더 쉽게 달성되었다.
단지 조정자의 입장에 서기를 원했던 엔리케는 사그레스를 떠나 형 페드루와 조카인 아폰수 왕을 화해시키려고 애썼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의 무장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자 엔리케는 가능한 한 뒷전에 머물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국왕의 편을 들기로 했다. 그는 1449년 5월에 벌어진 알파로베이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페드루는 상대편의 궁수가 쏜 화살에 우연히 맞아 죽었다. 집안싸움이 이처럼 슬픈 종결을 맞이한 이후에 엔리케는 세우타에 망명해서 여생을 무어족과 싸우며 보내고자 했으나 국왕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50년 후에 한 역사가가 쓴 글에는 엔리케가 형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그를 버린 것같이 기술되어 있다. 반면에 엔리케의 전기작가 주라라는 그가 페드루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단언하면서 이후의 글에서 그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이후에 상세한 설명을 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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