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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로베이라 전투 이후에 엔리케는 공적인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사그레스에서 보냈다. 그는 아프리카의 기니아 해안을 탐방하고 거래하기 위해 선박을 보낼 수 있는 독점권을 국왕으로부터 얻었다. 그는 이따금 리스본 궁정에 모습을 나타냈으며 1450년에는 국왕의 누이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결혼준비를 도왔다.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엔리케는 항해후원사업에 집중했다. 이 사업은 엔리케가 이미 발견된 지역과의 무역을 추진하는 데 주로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발견의 성과가 크지 못했다. 엔리케가 마지막으로 파견한 중요한 항해사 두 사람은 베네치아인 알비제 카다 모스토(카다모스토)와 포르투갈인 디오구 고메스였다. 이 두 사람은 서로 합심해서 카보베르데 제도의 여러 섬을 발견했다. 엔리케의 생전에 도달한 아프리카 해안의 가장 남쪽 지점을 일반적으로 시에라레오네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설에 따르면 그의 항해사들은 그보다 644㎞가량 더 내려가서 팔마스 곶까지 진출했다고도 한다. 엔리케는 생전에 탐험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부채를 안은 채 죽었다. 아폰수 5세는 발견에는 관심이 적었고 십자군 원정과 기사수업에 큰 열성을 보였다. 오랜 숙원인 모로코 정복사업을 재개하면서 1458년에 원정군을 이끌고 알카세르세게르(지금의 크사르엣쉬리르)를 쳤으며 엔리케가 이 원정에 동행했다. 이제 6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엔리케 왕자는 전투에서 잘 싸웠다. 알카세르세게르 성읍이 항복하자 아폰수는 항복조건을 자기 삼촌의 재량에 맡겼는데 그는 놀랍도록 관대하게 이 문제를 처리했다. 엔리케는 알카세르세게르에서 돌아온 후 2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영국인들이 엔리케 왕자에게 붙인 항해왕자라는 별명은 포르투갈 저작자들은 거의 쓰지 않으며 그 자신이 발견을 위한 항해에 직접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절한 명칭이 아니다. 그의 명성은 주로 항해자를 후원한 데서 연유하며 이 점에서 그는 위대한 지리상 발견시대의 개척자이며 유럽의 세계진출을 앞장서 이끈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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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엔리케의 최후 해상탐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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