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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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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유대

요약 BC 5~4세기에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유대인 종교지도자.
(히). ⁽Ezra⁾.

에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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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왔으며, 토라(〈구약성서〉 처음 5권에 담긴 율법)에 기초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한 개혁가이다.

그의 활동으로 인해 유대교는 율법 중심의 종교가 되었고 유대인들이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에즈라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유대교가 이후 여러 세기 동안 독특한 형태(즉 유대교가 바빌론 포로 시대 이후에 취한 특수한 형태)를 갖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유대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는 어느 정도 정당한 평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제2의 모세로 간주했다.

에즈라에 대한 지식은 〈구약성서〉의 〈에즈라〉와 〈느헤미야〉에 근거하며, 외경(유대교와 개신교에서 〈구약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책) 가운데 〈에즈라〉의 그리스어 본문과 〈느헤미야〉의 일부를 싣고 있는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는 에즈라에 해당하는 라틴어 이름)로 보충된다.

에즈라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이 이름은 〈구약성서〉에 언급되지 않음) 제7년에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BC 445~433년에 유다 지방의 총독을 지내다가, 잠시 공백기를 보낸 뒤 얼마 동안 다시 그 직위를 맡았던 것 같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그가 처음 총독이 되었을 때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제7년(BC 458)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이렇게 추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에즈라〉 내용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으며, 에즈라가 도착한 시기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제7년(BC 397), 즉 느헤미야가 무대에서 사라진 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동시대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은 제7년이라는 구절을 필사자(筆寫者)의 실수로 간주하고서, 에즈라가 도착한 시기는 느헤미야가 2번째로 총독직을 맡고 있었던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에즈라가 도착했을 때 유다 지방은 한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백성은 대부분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사회와 개인의 도덕 수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외국인들과 혼인한 사람들이 많아서 공동체가 이교(異敎) 환경과 뒤섞여 마침내 동질성마저 잃게 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에즈라는 제사장이자 '모세의 법에 통달한 율법학자'였다. 그는 유대인이 방종에 빠져 있음을 걱정하고 상황을 바로잡고자 한 엄격한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봄철에 상당한 규모의 대상(隊商)을 이끌고 유다 지방을 향해 출발하여 4개월 뒤에 도착했다.

그는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관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라는 칭호는 '황제의 유대인 종교문제 담당 비서', 혹은 그와 비슷한 관직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페르시아인들은 각 민족의 종교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지만, 민족들간의 갈등을 막고, 종교의 탈을 쓰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책임 있는 감독관이 각 종교들을 규제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에즈라는 '강 건너편'(아바르-나하라), 즉 유프라테스 강 서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파견된 감독관이었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왕의 법'을 어기는 셈이다.

에즈라는 유다에 도착하여 여러 조치들을 취했는데, 그 순서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가을(그가 도착한 해의 가을이었을 가능성이 큼)에 장막절을 지키고 있는 동안 백성에게 율법을 전했을 것이다. 그는 잡혼(雜婚)을 비판했고, 백성에게 자발적으로 외국인 아내들과 이혼하도록 설득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노력은 백성이 더이상 잡혼을 하지 않고,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며, 성전의 유지를 위해 매년 세금을 내고, 정한 시일에 십일조와 제물을 드리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율법이 정한 벌을 받겠다는 엄숙한 계약을 하느님 앞에서 맺을 때 절정에 달했다. 개혁을 단행한 이후의 에즈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1세기 헬레니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책 〈고대사 Antiquities〉에서 에즈라가 예루살렘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에즈라는 바빌로니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에서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성지(聖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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