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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3. 6. 24, 경기 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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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7 |
국적 | 한국 |
요약
시인·문학평론가·국문학자. 초기에는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고, 중반부터는 고전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대표작으로 <금성>, <문예공론>이 있다.
본관은 남해. 호는 무애.
아버지 원장과 어머니 강릉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아버지,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5~6년간 한학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를 졸업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3년 잠시 귀국하여 유엽·백기만·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일제 말기에 학교가 문을 닫자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9년 염상섭과 함께 순문예지 〈문예공론〉을 펴냈고, 1930년대에는 시 창작과 외국시 번역 소개, 문학비평, 고전문학 연구 등에 걸쳐 폭넓게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학교·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57년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문학세계
양주동의 문학세계는 크게 〈금성〉·〈문예공론〉 등 문예지를 주관하면서 폭넓게 전개했던 비평활동과 시집 〈조선의 맥박〉(1932)으로 구체화된 시세계, 그리고 국문학자로서 고전문학 연구에 기여한 학문적 업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의 문학활동은 첫 평론인 〈작문계의 김억 대 월탄의 논전을 보고〉(개벽, 1923. 6)에서 비롯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진출은 〈금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24년 〈금성〉 폐간 이후 도쿄에서 공부한 문학이론은 개성의 문제를 구체화시킨 평론 〈예술과 인격〉(동아일보, 1925. 7. 19)·〈철저와 중용〉(조선일보, 1926. 1. 10~24)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밖에 예술의 영원성과 시대성의 병립을 주장하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룬 〈예술과 생활〉(동아일보, 1926. 2. 5~6)·〈예술의 가치와 도덕성〉(동아일보, 1926. 5. 2) 등을 발표했다.
그는 여기서 예술은 예술적 인격(개성)의 완성이며 동시에 생활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뒤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문단잡설〉(신민, 1926. 9~12)이라는 시평을 통해 프로 문학의 성립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문학의 사회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민중의 삶과 현실에 대한 문학적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문예비평가의 태도〉(동아일보, 1927. 2. 28~3. 4)에서는 프로 문학이 내세우는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실천 등에 공감하면서도 문학을 사회현상의 발현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뒤 〈다시 문예비평의 태도에 취하여〉(동아일보, 1927. 7. 12~22)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당대 한국문단을 크게 순수문학을 고수하는 정통파와 문학의 사회적 공과만을 중시하는 반동파로 나누어 설명하고 양자를 모두 절충하는 중간파를 새롭게 설정하여 자신을 그곳에 포함시켰다. 그의 절충적 입장은 〈잡상수칙 雜想數則〉(동아일보, 1927. 12. 23)이라는 짤막한 수필과 〈정묘문단총관 丁卯文壇總觀〉(동아일보, 1928. 1. 1~18)이라는 평론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낭만성과 서정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시 〈어느 해 환상〉·〈임의 노래〉·〈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또한 시집 〈조선의 맥박〉은 1922년부터 10년간 쓴 자유시 53편을 모은 것으로 3부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전반적으로 개인의 정감에서 주지적 경향을 띤 사회적 의식으로 확대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의 의미를 '정서의 격동', '개성의 표현', '상상력', '음률적 언어' 등에 입각해 설명했으며 특히 시의 음률적 언어를 중요시했다.
그런가 하면 1930년대 중반부터는 고전문학에 관심을 갖고 〈향가의 해독에 취하여〉(조선일보, 1936. 1. 1~23)를 발표하여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쿠라 신베이[小創進平]의 소론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1943년에는 신라의 향가 25수를 풀이한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이 책은 오쿠라 신베이가 〈향가 및 이두의 연구 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를 펴낸 이후 14년 만에 이루어진 성과로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실려 있는 향가를 해독·주석한 것이다.
그뒤 〈고가연구〉라는 제목으로 1957년에 정보판(訂補版)과 1965년에 증정판(增訂版)을 펴냈다. 1947년에 펴낸 〈여요전주 麗謠箋注〉는 〈조선고가연구〉의 속편에 해당되며, 주석의 대부분은 8·15해방 이전에 발표한 것을 수집·보완한 것이다. 이외에도 해박한 지식이 엿보이는 수필집 〈문주반생기 文酒半生記〉(1959)·〈인생잡기〉(1962) 등과 번역시집 〈영시백선〉·〈현대영시선〉·〈T.S.엘리엇 시선집〉 등이 있고, 그밖에 저서로 〈상주(詳註) 국문학고전독본〉(1948)·〈국학연구논고〉(196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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