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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

다른 표기 언어 Karl (Theodor) Jas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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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3. 2. 23, 독일 올덴부르크
사망 1969. 2. 26, 스위스 바젤
국적 독일

요약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실존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인간의 자기 실존에 대한 직접적 관심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후기 저작에서는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몰락에 대응하여 사고의 새로운 통일을 모색했으며 이 통일을 세계철학이라고 불렀다.
야스퍼스는 심리학 분야에서 얻은 지위 덕분에 191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철학부(심리학과는 이곳에 포함됨)에 들어갔다. 야스퍼스는 철학 지식에 적합한 영역을 검토함으로써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다. 과학은 학문 방법론의 원리로 얻은 필증적으로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사실에 관한 지식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철학의 임무는 생각하고 실존하는 주체인 개인의 자유에 호소하고 또 모든 실재의 중심인 인간실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는 나치당과 불화했고, 전후에 대학을 재건하고 국민의 도덕적·정치적 재생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독일의 철학자이다.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철학을 창시했다.

ⓒ Materialscientist/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실존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인간의 자기 실존에 대한 직접적 관심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후기 저작에서는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몰락에 대응하여 사고의 새로운 통일을 모색했으며 이 통일을 세계철학이라고 불렀다.

초기생애와 교육

카를 빌헬름 야스퍼스와 헨리에테 탄첸의 세 아이 중 맏이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의 조상은 수세대 동안 북부 독일에서 살았던 농부·상인·목사였다. 법률가인 아버지는 그 지역의 치안판사였고 나중에는 은행장직을 맡았으므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어린시절 야스퍼스는 허약해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 후유증으로 청소년기에 만성 기관지확장증에 걸렸고 결국 심부전증으로 악화되었다. 이 질병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줄곧 그를 괴롭혔다. 학창시절 초기에는 뛰어나게 잘한 과목은 없었으나 독립정신은 유명했다. 그는 가혹한 규율을 싫어했기 때문에 학교당국과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실제로 학교당국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는 위협도 받았다.

1901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다음해 뮌헨으로 옮겨 법학연구를 계속했으나 그다지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그후 6년 동안 베를린대학교·괴팅겐대학교·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에서 의학을 연구했다. 1908년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박사학위논문 〈향수와 범죄 Heimweh und Verbrechen〉를 썼다. 1909년 2월 의사가 되었다. 이때 나중에 아내가 된 게르투르트 마이어와 사귀고 있었고 1910년 그녀와 결혼했다.

임상 정신의학에 대한 연구

1909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정신의학 진료소의 자원연구 보조원이 되어 1915년까지 근무했다.

이 진료소 소장은 저명한 신경생리학자 프란츠 니슬이었는데 그는 휘하에 뛰어난 보조원 팀을 거느리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선생들이 제공한 어떤 특정한 사고유형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정신의학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속도로 특별히 관심이 있는 환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보수 없이 일하기로 동의하고서야 이 연구를 허락받았다.

야스퍼스가 연구작업을 시작했을 때 임상 정신의학의 경험적인 기초는 마련되었지만 기본적 지식체계는 없었다.

임상 정신의학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 생명체의 갖가지 측면, 즉 해부학적·생리학적·유전학적 측면에서 신경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측면까지 다루었다. 이 측면들에 대한 연구는 인간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길을 열었다. 진단이 매우 중시된 반면 치료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자각하고 있던 야스퍼스는 정신병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깨달았다. 그 조건이란 이전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질병의 징후를 기술하여 다른 환자의 경우에도 쉽사리 확실하게 진단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고, 또 정신의학의 서로 다른 여러 분야에 적합한 다양한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야스퍼스는 현상학의 방법을 임상 정신의학 분야에 도입하려 했다.

현상학의 방법이란 의식적으로 경험한 현상을 인과적 설명이나 이론 없이 직접 연구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곧 열매를 맺었고 그는 정신의학의 신기원을 연 연구자로 명성을 얻었다. 1911년 겨우 28세의 나이에 야스퍼스는 유명한 출판업자 페르디난트 스프링거로부터 신경생리학 교과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2년 후 〈일반 정신병리학 Allgemeine Psychopathologie〉을 완성했다.

이 책의 특징은 정신의학 연구에 쓰이는 다양한 방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 방법들을 응집력 있는 전체로 종합한 점이다.

철학으로의 이전

야스퍼스는 심리학 분야에서 얻은 지위 덕분에 191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철학부(심리학과는 이곳에 포함됨)에 들어갔다.

이 대학교에서 그는 1916년 심리학과 조교수, 1920년 철학과 조교수, 1921년 철학과 교수, 1922년 철학부 차석(次席)교수가 되었다. 의학에서 철학으로 옮긴 부분적 이유는 의학부에 교수자리가 꽉 찬 반면, 철학부에서는 경험 심리학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야스퍼스의 지적 발전과도 일치했다.

1919년 야스퍼스는 〈세계관의 심리학 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강의록 일부를 출판했다.

그의 의도는 철학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의 경계에 닿아 있었다. 그 속에는 훗날 야스퍼스의 주요철학 저서에서 충분히 설명될 기본주제들 전부가 어렴풋이나마 드러나 있었다. 야스퍼스는 철학 지식에 적합한 영역을 검토함으로써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다. 과학은 학문 방법론의 원리로 얻은 필증적으로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사실에 관한 지식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를 따라 과학의 원리는 사회·인문과학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야스퍼스는 철학이 과학과 반대로 존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비록 예언의 성격을 갖더라도 보편타당한 가치규범과 삶의 원리를 세우려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야스퍼스는 점차 철학에서 예언적 통찰력의 역할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다.

그는 과학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도 종교적 신앙의 대용물이 되지 않을 철학을 개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결과로 나타난 체계는 과학을 전제했지만 인간 실존의 총체성을 조명하려 한 점에서 과학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야스퍼스에게 인간 실존은 단지 '세계 속에 있음'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자유를 의미했다. '나 자신'이라는 관념은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의 자유를 실현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철학의 임무는 생각하고 실존하는 주체인 개인의 자유에 호소하고 또 모든 실재의 중심인 인간실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휴머니즘, 과학철학).

1920~30년 야스퍼스는 이 사상의 싹을 다듬는 데 몰두했으며, 역시 유명한 철학자인 처남 에른스트 마이어와 공동으로 연구했고 마르틴 하이데거와도 우정을 나누었다.

얼마 후 하이데거가 국가사회당(나치)에 가입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우정은 깨졌다. 1930년대초 그의 지적 노동은 뚜렷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현대의 정신적 상황 Die geistige Situation der Zeit〉(1931)·〈철학 Philosophie〉(3권, 1932)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철학〉은 독일어 책 중에서 실존철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일 것이다. 1932년 막스 베버에 관한 책도 나왔다.

나치 당국과의 불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야스퍼스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국가사회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국가사회주의). 그는 나치운동이 내부에서 무너지고 당시 활동하던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재조직되고 해체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야스퍼스는 국가의 적으로 분류되었다. 1933년부터 대학에서 보직을 맡지 못했으나 강의와 출판활동은 허용되었다. 1935년 나중에 완성될 논리학 저작의 첫 부분이 〈이성과 실존 Vernunft und Existenz〉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1936년 니체에 관한 저서, 1937년 데카르트에 관한 논문, 1937년 또하나의 논리학 예비저작인 〈실존철학 Existenzphilosophie〉이 나왔다. 그는 당시의 이름난 많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국가사회주의 노선과 어떠한 타협도 하려 하지 않았다. 그결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그후의 출판활동을 무조건 금지당하는 등 일련의 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 독일에서 연구작업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했다. 친구들은 그가 다른 나라로 이민가도록 도우려 했다. 1942년 마침내 스위스 여행이 허가되었으나 나치는 그의 아내가 독일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이 조건을 거부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내와 함께 남기로 결심했다. 친구들은 그의 아내를 숨겨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체포될 경우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1945년 그는 4월 14일에 강제수용될 예정이라는 믿을 만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3월 30일 미국이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했다.

이 시기에 겪은 일로 환멸을 느낀 야스퍼스는 점점 더 자기 자신 속으로 움추러 들었다.

그는 인간을 배반한 과학과는 달리 자유롭고 책임 있는 지식탐구를 보여주기 위해 〈일반 정신병리학〉을 개정했다. 또 논리학 저서 〈진리에 대하여 Von der Wahrheit〉를 완성했다. 이 책의 제1부에서 그는 당시의 비합리주의 학설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전후의 사상발전

독일이 항복한 후 야스퍼스는 대학을 재건하고 국민의 도덕적·정치적 재생을 도와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전후 이 2가지 과제를 완수하는 데 온 정력을 바쳤다. 군정청에 대해 대학의 이익을 대변했고 〈대학의 이념 Die Idee der Universität〉(1946) 속에는 대학을 가장 잘 복구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모아놓았다. 그는 교수진에서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치와 타협하지 않은 교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요구는 실행될 수 없었다.

나치 시기 이전과 같은 자율적인 대학이 독일에서 다시 나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야스퍼스는 독일의 도덕적·정치적 갱생을 위해서는 민족의 유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탁월한 정치저작 〈책임문제 Die Schuldfrage〉(1946)에서 야스퍼스는 전쟁범죄와 잔학행위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 적극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도덕적으로 유죄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아 남기 위해 이러한 일을 소극적으로 묵과한 사람들은 단지 정치적으로만 책임이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모든 생존자는 동일한 책임을 지고 있고 집단적으로 유죄라고 했다. 아무도 이러한 집단적 유죄와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독일 국민은 사회를 붕괴상태에서 더욱 고도로 발전시키고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민주주의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매우 실망했다. 1948년 봄 스위스 바젤대학교 철학교수직을 수락했다. 독일 국민은 자기들을 도덕적으로 갱생시키려 했던 야스퍼스의 생각을 분명히 무시했음에도 그의 출국을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야스퍼스 자신은 바젤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 다시 한번 전체 철학분야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고 수정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수정작업을 이끈 주요지침은 통신과 전쟁 분야의 현대 기술 때문에 인류는 세계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신념이다.

이 새로운 사고 발전을 야스퍼스는 세계철학이라고 규정했고, 그 주요과제는 자유로운 세계질서에 기여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가 실존철학에서 세계철학으로 넘어간 까닭은 색다른 종류의 논리학이 모든 인류 사이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상은 〈철학적 신념 Der philosophische Glaube〉(1948)·〈계시와 연관한 철학적 신념 Der philosophische Glaube angesichts der Offenbarung〉(1962)에서 나타났다. 모든 사상은 본질적으로 신념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인간의 과제는 철학적 사고를 이 세계의 덧없는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이상학과 종교의 모든 체계에 대한 과거의 설명을 대체하기 위해 야스퍼스는 암호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은 체계들이 암호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하게 될 경우 모든 체계를 대표할 수 있는 철학적 추상이었다. 다시 말해 암호 개념은 다양한 사고체계들이 공통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리하여 과거보다 훨씬 더 관대한 태도를 낳는다.

〈위대한 철학자들 Die grossen Philosophen〉(1957)이라는 제목의 세계철학사는 과거의 사상들이 과연 얼마만큼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시간에 대하여 Vom Ursprung und Zeit der Geschichte〉(1949)라는 일반세계사를 쓰기 시작했다. 역사의 중심에 놓이는 중추적 시기(BC 800~200)에 현재 인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기본적 피조물이 생겨났다.

이 저작을 준비할 때 떠오른 영감에 따라 야스퍼스는 〈원자탄과 인간의 미래 Die Atombombe und die Zukunft des Menschen〉(1958)에서 세계의 정치적 통일가능성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세계의 정치적 통일의 목표는 절대적 주권이라기보다 세계연방이고 연방제에서는 다양한 개체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의사소통할 수 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사상의 영향하에서 말년 동안 세계정치와 독일 정치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들이 점점 더 민족적 정당 과두제로 기우는 듯이 보였을 때 그는 〈독일 연방공화국은 어디로 나아가는가? Wohin treibt die Bundesrepublik?〉(1966)에서 이러한 경향을 통렬하게 공격했다.

이 저작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서독 정치가들 사이에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야스퍼스는 1967년 독일 여권을 반납하고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함으로써 그들의 부당한 태도에 맞섰다. 1969년 사망할 때까지 30권의 저서를 발표했고 그밖에도 많은 중요한 서한과 3만 쪽에 달하는 수고(手稿)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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