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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8. 2. 16, 미국 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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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8. 3. 27, 워싱턴 D. C.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역사가·문필가.
서양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자서전 가운데 하나인 〈헨리 애덤스의 교육 The Education of Henry Adams〉의 저자이다.
애덤스는 보스턴 브라민 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혈통인 교양 있는 지식인 집단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이며, 할아버지는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였다. 아버지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1807~86) 역시 애덤스 가문의 지도자 전통을 계승해 외교관이자 역사가,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동생 브룩스(1848~1927)는 역사가였으며, 형인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2세(1835~1915)는 작가이자 철도회사 경영자였다. 어머니인 애비게일 브라운 브룩스는 보스턴에서 가장 부유한 명문 집안인 브룩스 가문의 딸이었다.
이런 전통은 애덤스에게 깊은 도덕 관념을 심어주었다. 그는 결코 가문의 전통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은 20세기의 새로운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17, 18세기의 아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애덤스는 1858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지체 높은 사람들이 보통 하던 대로 즐거움과 직업을 찾기 위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베를린대학교에서 민법 강의를 들으며 1859년 겨울을 보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애덤스의 아버지를 영국 주재 공사로 임명했다.
23세가 된 헨리는 아버지와 함께 런던에 가서 1868년까지 아버지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네이션 The Nation〉지를 비롯한 유력한 신문의 통신원이 되어 워싱턴 D. C.로 갔다. 그는 전쟁이 뒤흔들어놓은 나라를 빨리 재건하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수도의 사교생활과 정치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무원 사회를 개혁하고 은본위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치적 부패를 폭로하고 경제적 독점 기업, 특히 철도회사의 세력 성장을 경고하는 수많은 평론을 썼다.
이 평론들은 〈이리 호(湖)에 관한 글과 그 밖의 평론들 Chapters of Erie and Other Essays〉(1871)로 출판되었다. 애덤스는 미국 '정치인'들의 범속함 때문에 늘 짜증을 내고는 했는데, 그는 베네치아에서 물을 빼내면 멋진 도시가 될 것이라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노스 아메리칸 리뷰 North American Review〉지 편집장(1870~76)으로 일하면서 개혁운동을 계속한 그는 자유공화당 결성에 참여했다.
그랜트 행정부의 파벌 싸움과 추문에 반감을 품은 이 집단은 1872년 공화당을 탈퇴하여, 민주 당원 호리스 그릴리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곧 좌절되었고 애덤스는 원칙이 없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선동적인 정치가들을 혐오했고 모든 사람이 '강력한 집단의 하인'이 되는 사회에 진저리를 냈다.
그는 "미국인들은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다. 그들은 매일 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볼 수도 없다. 외부 세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깊은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의 태도나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익명으로 발표한 장편소설 〈민주주의, 미국식 소설 Democracy, an American Novel〉(1880)에는 그가 신념을 상실했음을 반영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매덜린 리는 애덤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워싱턴 정치가들과 친해진다.
그녀는 중서부 지역 출신 상원의원의 절친한 친구로서, 민주주의의 절차를 알게 되었으며 대통령을 만나고 대통령과 똑같이 어리석은 인물들을 만난다. 매덜린은 권력 뒤에 있는 흑막을 알고 난 뒤,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는 내 신경을 산산조각내버렸다."
1870년 하버드대학교 총장 찰스 W.엘리엇에 의해 중세사교수로 임명되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데 세미나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절의 재무장관인 앨버트 갤러틴의 논문을 편집하기 위해 1877년 교수를 그만두었다. 미국 역사에 계속 관심을 쏟아 〈앨버트 갤러틴의 생애 The Life of Albert Gallatin〉(1879)·〈존 랜돌프 John Randolph〉(1882)의 전기를 2권 완성했다.
그는 발전중인 미국 민주주의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미국의 초기 국가 시대를 계속 탐구했다.
이 연구의 결실이 〈미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9권, 1889~91)로, 제퍼슨부터 매디슨까지의 정부를 다루었는데 출판되자마자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저서에서 그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통해 평등주의에 사회를 통치하는 모순에 관해 연구했다. 1884년에는 2번째 장편소설인 〈에스더 Esther〉를 썼다. 필명으로 발표한 〈에스더〉에서는 종교와 근대 과학의 관계를 다루었는데, 이것은 그가 평생 사로잡혔던 주제였다.
1885년에 13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아내 매리언 후퍼가 자살하자 애덤스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비탄에 빠진 그는 아내의 무덤에 놓기 위해 망토를 걸친 신비로운 여인의 조각상을 주문했다.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애덤스는 끝내 재혼하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뒤 애덤스는 불안한 방황을 시작했다. 그는 남태평양제도에서 중동지방에 이르기까지 지구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차츰 여행 범위를 좁혀 겨울에는 워싱턴에서, 여름에는 파리에서 지냈다. 애덤스는 이 시기에 자신의 생활 모습을 '동굴 거주자'라고 표현했지만 실생활은 정반대였다.
1870년대부터 그의 말년까지 지식인들은 그의 집에 모여 예술·과학·정치·문학을 토론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영국의 외교관인 세실 아서 스프링 라이스 경과 건축가 헨리 호브슨 리처드슨,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로지가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지질학자인 클래턴스 킹과 외교관인 존 헤이였다.
애덤스와 킹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나눈 편지는 뜬소문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사상 경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애덤스는 '자기 시대까지 내려온 동향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고정점'을 찾기 위해 역사의 구석진 곳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 고정점은 13세기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그는 〈몽 생 미셸과 샤르트르 Mont-Saint-Michel and Chartres〉(1904 자비 인쇄, 1913 정식 출간)에서 중세의 대성당에 반영된 세계관을 설명했다.
그는 이 건물들이 '인간이 느끼는 가장 깊은 감정, 즉 무한한 존재를 파악하려는 지극히 작은 인간의 노력'을 표현한다고 믿었다. 중세의 매력은 그 시대의 이념적 통일성, 즉 가톨릭 신앙 속에 표현되어 있고 성모 마리아로 상징되는 일관성 때문이었다.
〈몽 생 미셸과 샤르트르〉의 자매편인 〈헨리 애덤스의 교육〉(1906 자비 인쇄, 1918 정식 출간)은 애덤스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며 자서전의 걸작으로 꼽힌다. 앞의 책과는 대조적으로 이 책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의 세계, 특히 과학과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세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애덤스는 중세의 성모 마리아에 맞서는 20세기의 새로운 신(神)은 근대사의 무질서한 힘을 상징하는 다이나모('발전기')로 보았다. 그는 당시 생활의 원심력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실패를 기록했다. 이 책은 애덤스가 관습에 얽매인 세계에서 태어나 확실성이 사라진 근대의 실존주의적 우주로 옮아가면서 현실과 대결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역사도 교육도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이 현실과 맞설 수 없다고 믿고 인간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환상을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13~20세기의 연결선을 그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변화뿐이라고 애덤스는 결론지었다.
1908년 애덤스는 1898~1905년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친구 존 헤이의 편지와 일기를 편집·출판했다. 그의 마지막 책인 〈조지 캐벗 로지의 생애 The Life of George Cabot Lodge〉는 1911년에 출판되었다. 한편 2편의 명상록 〈역사에 적용되는 단계의 규칙 Rule of Phase Applied to History〉(1909)·〈미국의 역사 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American Teachers of Histroy〉(1910)에서 세계의 종말을 예견했다.
그는 에너지 분산이라는 과학적 법칙을 바탕으로 문명도 4단계 즉 종교적 단계, 기계적 단계, 전기적 단계, 에테르 단계를 통해 차츰 퇴보했다고 설명하고 세계의 종말은 1921년에 일어나리라고 예언했다. 애덤스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런 예언을 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1912년 74세가 된 애덤스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노망이 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줄곧 시달렸는데 이 두려움은 잠시였지만 현실이 되었다. 3개월 동안 반신불수 상태로 누워 정신이 이성과 섬망 상태를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다시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복되었다. 그는 워싱턴의 집에서 잠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둔 뒤 소원대로 아내 곁의 비명 없는 무덤에 묻혔다. 죽은 뒤 1919년에 그는 〈헨리 애덤스의 교육〉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애덤스는 객관적이면서도 신랄하고 풍자적인 문체로 유명하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미 급한 부적격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가 중세시대에 매혹되고 자신의 실패를 계속 강조한 것은 염세주의를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좀더 동정적인 논평가들은 애덤스를 20세기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던 낭만주의적 인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애덤스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민감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몸서리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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