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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시기
청일전쟁(1894~95)에서 청이 패하고 그뒤에 위기가 계속되는 틈을 이용하여 쑨원은 1895년 홍콩으로 가서 자신이 태어난 광둥 성의 성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6년에 걸친 해외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6년 쑨원은 런던 주재 중국공사관에 13일 동안 억류되었는데 그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다. 그가 공사관 직원으로 일하던 고향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어 변장을 하고 공사관으로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신원이 노출되어 붙잡힌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공사관 측은 그를 중국으로 압송시킬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차린 그가 중국공사관에 근무하는 영국인 직원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공사관측의 의도를 전(前) 홍콩 서의서원 원장이었던 제임스 캔틀리에게 알리게 했다.
그결과 영국 외무성이 개입하여 그는 억류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태는 여론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정치역정에 큰 힘이 되었다. 그후 8개월 동안 대영박물관에서 독서로 소일하던 쑨원은 그뒤 캐나다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갔다. 1897년 7월 일본에 도착하여, 그의 런던 사건을 잘 알고 그의 정치활동을 돕겠다고 나선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영접을 받았다. 미야자키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의 많은 영향력있는 일본인들에게 쑨원을 소개시켰고, 쑨원은 후에 이들 가운데 몇몇 인사로부터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00년의 혼란한 사회상황 속에서 쑨원은 홍콩 총독 헨리 블레이크와 홍콩 지역의 영향력 있는 중국인을 끌어들여 비밀작전을 진행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홍장을 설득시켜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쑨원은 이홍장의 부하직원이 보낸 초청장에 응하여 홍콩으로 갔지만 함정을 두려워하여 상륙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미야자키 도텐과 2명의 다른 일본인 동료를 회의에 참석시켰으나 소득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쑨원은 광둥의 비적들 및 비밀결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이 세력들은 1900년 10월 후이저우[惠州]에서 봉기했다. 12일간 지속된 이 봉기는 쑨원 자신이 1895년부터 1911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주장한 10회의 봉기 중 2번째였다.
중국혁명동맹회의 결성
1903년은 쑨원의 정치경력에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이때부터 중국 내의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세력인 지식인 계급이 대거 그의 운동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다음의 2가지 요인에 크게 힘입었다. 첫째, 청조의 쇠퇴가 꾸준히 계속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량치차오[梁啓超]의 강력한 선전활동 덕택이었다. 량치차오는 1898년 일본으로 도피한 개혁운동가로서 일본에서 중국어 신문을 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량치차오는 청조의 체제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중국의 통치자인 서태후(西太后)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그 체제에 손상을 입혔고 혁명만이 유일한 논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결과 중국의 해외유학생 사이에서 쑨원의 주가는 꾸준히 오르게 되었다. 1904년에는 유럽 내의 여러 지역에 혁명조직을 심어놓을 수 있었고, 1905년에는 도쿄[東京] 소재의 동맹회(쑨원의 흥중회, 황싱[黃興]·쑹자오런[宋敎仁] 등의 화흥회, 장빙린[章炳麟] 등의 광복회가 한데 뭉쳐 결성한 혁명단체)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뒤 3년 동안 이 단체는 기관지인 〈민바오 民報〉를 통해 효과적인 선전활동을 펼 수 있었다.
쑨원은 정치적 환경이 좋아지는 만큼 그 이상의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맹회는 그 조직이 매우 느슨하여, 그에게는 개개 구성원에 대한 감독권이 없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와 다른 혁명동지들이 벌인 반란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동맹회원들은 절망에 빠졌고 외부의 기탁금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욱이 청 정부가 취한 압력조치의 여파로 외국정부들이 점점 더 그를 기피하게 되었다. 1907년 일본정부는 그에게 상당액의 돈을 내놓으면서 일본을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1년 뒤 그가 혁명모의를 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도 그는 완전히 추방당했다.
홍콩과 그밖의 여러 지역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쑨원은 1909~10년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910년 6월 아시아로 잠깐 돌아와 여러 혁명동지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고 광저우를 무력으로 탈취하려는 대규모 봉기를 모의했다. 1910년 12월 다시 서구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더 많은 돈을 모금했다.
그러나 광저우에서 일어난 4·27봉기(중국 역법에 따라 3·29혁명으로 알려져 있음)는 이전의 봉기와 마찬가지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리하여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청 정부가 그의 혁명에 도움을 주는 국면이 도래했다. 자구책이긴 했으나 청 정부는 1901년 이래로 개혁을 실시해왔다. 그뒤 몇 년 동안에 청 정부는 군대를 개편하고, 학교제도를 신설했으며, 전통 유교경전 학습에 바탕을 둔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또 많은 정부기관을 재조직했고 각 지방과 수도에 의회를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은 계급은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결과 청 정부는 위기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었다.
신해혁명의 발생
1911년에 청 정부는 간선철도를 모두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는데, 이것이 각 지방의 철도 관계 사업자들을 격분시켰다.
쓰촨 성[四川省]에서 무장폭동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여 더 많은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1911년 10월 우한[武漢]의 혁명군이(당시 중국은 각 지방에서 혁명군이 기세를 떨치고 있었음) 또다른 반란을 시도했는데, 여러 가지 협조가 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성(省)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공을 계기로 다른 성들에서도 성 정부에 대한 전복이 계속되었다.
쑨원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서 신문을 통해 우한 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11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와 난징[南京]에서 열린 대의원 회의에서 임시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의 정부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북양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상을 맺었다. 1912년 2월 12일 황제는 폐위되었다.
그 다음날 쑨원은 임시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4일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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