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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 8월에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아주 관대한 포고령이 내렸다(→ 생제르맹 평화조약).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내전의 종식을 기대했다.
평화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카트린 왕후는 앙리 공작과 자기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원래 이 결혼은 앙리 2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즉 앙리와 마르그리트가 어렸을 때 처음 고려된 적이 있었다. 1572년 봄까지 계속된 우여곡절 끝에 카트린과 나바라 여왕은 합의에 이르렀다. 나바라 여왕은 아들보다 먼저 파리로 떠났지만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앙리는 나바라 왕이자 베아른의 군주가 되었다. 그와 마르그리트는 8월 18일 노트르담 성당의 정문 앞에서 혼인 서약을 했지만 혼인 미사에는 처가 쪽 왕족들만 참석했다.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대학살이 일어나 수천 명의 프랑스 위그노가 왕실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유혈 사태로 인해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피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앙리는 프로테스탄트를 포기하라는 처남 샤를 9세의 명령에 굴복했다. 하지만 그의 개종이 분명 참다운 것인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앙리는 3년 반 동안 샤를 9세와 그뒤를 이은 앙리 3세의 궁정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앙리는 초조한 마음을 신중하게 억제하면서 그를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강인한 성격을 감추었다. 교활한 카트린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아 사위가 아들인 앙리 3세의 궁정에서 탈출하는 것에 은밀히 동의했다. 일단 자유의 몸이 되자 앙리는 날카로운 지성과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해 프로테스탄트의 보호자 역할을 해냈다. 그가 지닌 가장 뛰어난 재능은 분별력이었는데, 1576년말 내전이 재발했을 때 이를 입증해 보였다.
위그노가 연패를 당하자 상황을 정확히 판단한 앙리는 교우들에게 싸움을 포기하고 1577년 9월 17일의 베르주라크 평화조약(프로테스탄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내용이지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딸 마르그리트를 남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기옌으로 갔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목적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지속적인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네라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앙리는 가톨릭교도가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 성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플뢰랑스를 기습 공략하여 전멸시킴으로써 타고난 군사 지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1580년 봄 그는 5일 동안 계속된 치열한 시가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카오르를 점령하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온통 피와 화약으로 뒤범벅이 된' 전투에서 벗어났다. 그의 소유지인 몽드마르상 시가 자신에게 반환되지 않자 1583년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정력적인 남자는 전쟁과 정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앙리는 영토 정복만이 아니라 낭만도 즐겼는데 1583년 여름 그는 기슈 백작 부인인 코리상드 당두앵과 연애를 시작하여 여러 해 동안 관계를 지속했다. 베아른의 고위 귀족인 기슈 백작 부인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으로서,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는 그녀를 '위대한 코리상드'라고 예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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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바라 왕 시절의 앙리 4세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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