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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른 시절의 앙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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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1555년부터 나바라 여왕을 지낸 잔 달브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앙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프랑스 카페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국왕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이미 셋이나 낳았고 4번째 아이를 곧 낳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앙리는 어린시절을 대부분 베아른에서 보냈다. 1561~67년 그는 국왕의 자녀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중 마르그리트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무렵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종교적 위기가 싹트기 시작해 결국 기나긴 내전으로 이어졌다(→ 위그노). 앙리의 아버지 앙투안은 잠시 프로테스탄트와 동맹을 맺었지만 곧 편을 바꾸어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앙리의 어머니 잔 달브레는 확고한 신앙을 지키다가 1560년 크리스마스 때에 칼뱅교를 선언했다. 앙리가 막 13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를 베아른으로 다시 데려왔다.

지적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이때에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키워졌으며 동시에 군사 교육도 받기 시작했다. 1567년 가을 그는 나바라 남부의 반항적인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원정대의 이름뿐인 지휘자가 되어 이 원정을 간단히 승리로 끝맺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3번째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처음 2차례의 종교전쟁 때는 중립을 지켰던 잔 달브레도 이번에는 기꺼이 참전했다. 잔 달브레는 라로셸로 가서 아들을 위그노의 지도자인 시동생 콩데 공(公) 부르봉의 루이 1세에게 맡겼다. 1569년 3월 13일 프로테스탄트들은 자르나크 근처에서 앙주 공작(나중에 앙리 3세가 됨)에게 기습 공격으로 패배당했고 콩데는 전사했다(→ 자르나크 전투). 잔 달브레는 당장 전쟁터로 달려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실제 지휘는 후에 앙리가 군사교육을 받게 될 가스파르 드 콜리니에게 맡겨졌다. 앙리와 그의 사촌인 소(小)콩데 공작 앙리는 10월 3일의 몽콩투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도 프로테스탄트들은 다시 패배를 맛보았지만 콜리니는 앙리가 칼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세의 장군이 된 앙리는 1570년 6월 26일 아르네르뒤크 근처에서 처음으로 출전해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다(→ 아르네르뒤크 전쟁). 푸아투에서 부르고뉴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오랫동안 원정하면서 얻은 경험은 그에게 평생 동안 간직할 군인 정신을 심어 주었고, 왕국에 덮친 재난을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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