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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2~13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발생한 카타르파 이단 분파.
이들이 '알비파'라는 이름을 가진 때는 12세기말경으로 추측되지만, 이 운동의 중심지가 알비(고대에는 '알비가')보다는 툴루즈와 주변지역들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무역로를 따라 이 지역들에 파고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이 이단 분파는 원래 동유럽에서 왔다. 알비파교도들의 이름 가운데는 종종 불가리아 사람들의 이름(Bougres)이 나오며, 이들은 항상 트라케의 보고밀파와 관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알비파에 관한 지식은 이들이 남긴 자료들이 드문데다가 내용이 부실하고 반대파들의 자료들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알비파 교리들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기란 매우 어렵다.
확실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가톨릭 교회 와 대립하여 반성직자파를 결성하고 당시 성직자들의 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남부에서 '선량한 사람들'(bons hommes 또는 bons chrétiens)로 알려진 알비파 신학자들과 금욕주의자들은 언제나 소수파였다.
최초의 카타르파 이단들은 1012~20년 리무쟁에서 나타났다. 아키텐의 공작 기욤 9세와 남부 귀족들 대다수에게 보호를 받은 이 운동은 남부에 뿌리를 내렸다. 1119년 툴루즈 공의회가 교회 당국을 도와 이 이단을 진압하라고 세속 정부에게 명령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당시 국민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금욕생활과 성직제도를 비판하는 이들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 운동은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에 오르기 전까지 100년 동안 계속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개종시키려 했으나, 마침내 1209년 시토 수도회 수사들에게 알비파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라고 명령했다. 타협의 여지가 없던 이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 북부의 귀족들 전체가 남부 귀족들을 공격하여 찬란한 프로방스 지방의 문화를 짓밟고난 뒤 파리 조약(1229)으로 끝났다(→ 알비 십자군). 이 조약은 남부 영주들의 독립성을 무너뜨리고 전쟁 동안 알비파교도들을 대량학살했으나 이단을 박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툴루즈, 알비, 그밖의 남부 도시들에서 13, 14세기 대부분에 걸쳐 지속적인 활동을 펼친 끝에 이들을 뿌리뽑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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