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10. 5. 18, 황해 신천 |
---|---|
사망 | 1982 |
국적 | 한국 |
요약 문학평론가. 1930년대 '농민문학문제'를 거론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
해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해주지부에서 활동했다. 1930년 농민문학문제를 제기하면서 활발한 비평활동을 시작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1942년경 국민문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해방 후 해주에서 황해도 예술연맹 위원장을 지냈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평양예술문화협회에 가담했으며, 1946년 3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과 제1서기장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종언이란 본명으로 시평을 쓰다가 함광으로 이름을 바꾸고 농민문학론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농민문학문제에 대한 일고찰〉(조선일보, 1931. 8)에서 그가 빈농계급에게 노동계급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백철은 노동계급사상을 기계적으로 주입시키는 것보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에 그는 자신의 논리가 무리임을 시인하고 KAPF도 일본의 나프(NAPF)처럼 농민문학연구회를 두어 계급사상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또한 〈창작방법문제 재검토를 위하여〉(조선중앙일보, 1935. 6. 30~7. 4)·〈창작방법론 문제 논의의 발전과정과 그 전개〉(조선일보, 1936. 5. 30~6. 6) 등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여 창작방법론에 대해 논의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과 소련의 현실이 다르므로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김남천의 이론에 동조하고 박승극·한효의 이론에 반대하는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옹호했다. 그밖에 평론으로 〈예술의 순수성 문제〉(동아일보, 1937. 6. 26)·〈문학에 있어서의 개성과 보편성〉(조선일보, 1939. 6. 28~7. 1)·〈국민문학의 문제〉(매일신보, 1943. 8. 24~31) 등이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민족문학론을 펼치면서 〈민족과 문학〉(1947)·〈문예론〉(1947)을 발간했으며 조기천의 〈백두산〉을 비판했다가 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0년 〈문학과 현실〉을 간행했고 1954년부터 김일성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문학사를 강의했다. 1956년 북한 최초의 〈조선문학사〉를 간행했고, 1964년부터 문학사 총 16권 중 제9, 10, 11권(19세기 말~1945)을 쓰기도 했다. 1966년 평론집 〈문학의 탐구〉를 간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1967년 5월 주체사상의 유일사상 체계화에 반대하다가 숙청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문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