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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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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57, 중국 뤄양[洛陽] |
국적 | 중국 |
요약
안사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대연 제국을 세워 당나라를 전복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안사의 난은 미수에 그쳤지만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안녹산은 736년 토격사로 근무하다가 무모한 행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뒤 사면되어 742년 절도사가 되었고, 이후 현종과 그의 비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다. 재상인 이임보가 죽은 752년에 안녹산과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755년 안녹산은 동쪽 수도인 뤄양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대연 황제임을 선포했다. 현종은 장안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했으며, 현종의 금위군에 의해 양국충이 죽고 양귀비가 처형을 당했다. 안녹산은 757년 자신의 맏아들인 안경서의 사주를 받은 환관에 의해 살해되었다. 안사의 난은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에 의해 몇 년 간 더 지속되었으나, 763년 사조의가 죽자 공식적으로 끝났다.
개요
시호는 안랄왕(安剌王). 안사(安史)의 난(755~763)을 일으켰다.
이듬해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대연(大燕) 제국을 세워 당나라를 전복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안사의 난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생애와 경력
안녹산의 '안'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녹산'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의 조상은 동(東)돌궐에 편입된 소그드인에 속했고, 어머니는 돌궐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6세기경부터 몽골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동돌궐은 당대 초기에 태종(太宗)에 의해 복속되었으나 독립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안녹산이 태어난 무렵에는 새롭게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716년에 죽자, 무질서와 권력투쟁에 빠져들게 되었고 안씨 일족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당시 외족 출신 군인들을 등용시켰던 현종(玄宗:712~756 재위)의 변경정책 때문에 안녹산과 그의 사촌인 안사순(安思順) 및 기타 한족이 아닌 군인들도 중국 군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736년 이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당시의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한족 출신의 군인들을 장수로 임명하는 것을 기피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세력을 얻게 되어 궁중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한족이 아닌 장수들도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안녹산은 지금의 남만주에 해당하는 북동부 지역에서 군경력을 쌓았다.
〈당사 唐史〉에 그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것은 736년 조(條)인데, 이해에 그는 토격사(討擊使)로 근무하다가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를 모두 잃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뒤 사면되어 급속히 출세가도를 달려서 742년 처음으로 절도사가 되었다. 절도사가 된 이후에 수도 장안(長安)을 자주 방문해 현종과 그의 비(妃)인 절세미녀 양귀비(楊貴妃)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매우 뚱뚱했던 안녹산은 현종과 양귀비의 눈에 들기 위해 바보짓도 능숙하게 잘 해냈다.
궁중에서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생일이 지난 지 3일 뒤에 궁중 여인들의 숙소에 초대되어, 엄청나게 큰 아기 기저귀에 둘러싸인 채 양귀비의 자식으로 입양되는 희극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황당무계한 행동 때문에 그와 양귀비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도 돌아 후대의 속설에 흥미를 더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궁중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현종과 양귀비의 후원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안사의 난
재상인 이임보가 죽은 752년에 안녹산은 평로(平蘆)·범양(范陽)·하동(河東)의 3진(鎭)을 다스리는 절도사였고, 제국 내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장수였다.
이임보의 사망 직후부터 안녹산과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사망한 이임보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양국충은 궁중 내의 안녹산 지지자들을 비난하고 제거할 수는 있었으나, 국내의 다른 지방에 있는 안녹산의 군대를 견제할 군사시설을 확보하는 일과 북동방면에서 안녹산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양국충은 그의 의심과 분노만 돋구었다. 마침내 755년말 안녹산은 양국충을 제거하라는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으로 단련된 대규모 군대를 남하시켜 수도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개월 만에 반란군은 동쪽 수도인 뤄양을 함락시켰고, 756년 음력 정월에 안녹산은 스스로 대연 황제임을 선포한 뒤 성무(聖武)로 개원했다.
한편 당의 관군들은 산시[陝西]로 들어가는, 황허 강[黃河] 북쪽의 좁은 계곡인 동관(潼關)에서 방어태세를 취했다.
6개월 동안 반란군은 더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당시 장안으로 들어오는 동쪽 진입로를 차단하면서 수비태세를 취한 관군의 사령관은 가서한이었는데, 양국충과 가서한 사이에는 묘한 질시와 경쟁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가서한이 자신에 대항하여 모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던 양국충은 현종에게 청해 가서한에게 수비태세를 버리고 반란군을 추격해 동쪽으로 진군하게 했다.
그결과 당의 관군은 궤멸되었고 장안으로 가는 길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현종은 급히 장안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했다.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 마외파(馬嵬坡)에서 현종의 금위군(禁衛軍)들이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의 애첩인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하자 현종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양귀비의 처형은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장한몽 長恨夢〉과 기타 많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안녹산의 군대는 장안을 점령했으나 그 자신은 뤄양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중병에 걸려 있었는데, 아마도 당뇨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의 실명상태였고 지나칠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그의 수행원들은 늘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757년초 자신의 맏아들인 안경서(安慶緖)의 사주를 받은 환관에 의해 살해되었다. 반란은 안경서, 안녹산의 부장(部將)이었던 사사명(史思明), 그 아들 사조의(史朝義)가 연이어 주도하는 가운데 몇 년 간 더 지속되었다.
마침내 763년 사조의가 패하여 죽음으로써 안사의 난은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반란군을 무찌른 주된 역할은 위구르족이 보내온 파견군이 맡아 해냈다. 그당시 위구르족은 돌궐족을 중국 동부의 스텝 지역에서 몰아내고 이 지역의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당의 지원세력이었다. 이즈음 당은 너무나 피폐해져 있어서 반란지역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살아남은 반란군 장수들은 항복만 해오면 용서되었고, 당에게 형식적으로 복종을 약속하는 대신에 그들의 관할지역을 계속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한족 장수들이 관할하고 있던 다른 지역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이들도 반란군 장수 못지 않게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당대 후반과 그뒤의 오대(五代) 시기에는 군벌주의가 만연했는데, 이 문제는 960년 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안녹산은 죽은 뒤 북동쪽 변방지역에서 한족 출신이 아닌 군인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변방 군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외족 출신 군인들의 야망을 그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안사의 난에서 나타난 외족들의 야만성은 한족에게 외족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이러한 감정은 당대 후반에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되었다.
이것은 당 전반의 수용적·사해동포적(四海同胞的)인 관대한 태도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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