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542. 10. 15, 인도 신드 우마르코트 |
---|---|
사망 | 1605, 아그라 |
국적 | 무굴 |
요약 악바르는 인도 대륙 대부분을 무굴의 지배권 내로 끌어들였다.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비이슬람교도의 충성을 얻을 수 있는 계획을 세웠으며, 중앙의 행정력을 개혁하여 강화하고 동시에 재정구조를 중앙집권화했으며 세금징수과정을 재조직했다. 그 자신은 이슬람교를 결코 버리지 않았지만 다른 종교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슬람교도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 파시교도, 그리스도교도들에게도 자기 앞에서 자유롭게 종교적인 토론을 하도록 권유했다. 자신은 문맹이었지만 학자, 시인, 화가, 음악가들을 지원하고 그의 궁전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악바르 시대건축으로 특징지어지는 힌두교와 이슬람 건축양식의 결합은 악바르가 장려한 두 문화의 교류를 상징하며, 그의 치세는 문화 간의 만남에서 놀라운 결과를 낳은 좋은 사례가 되었다.
개요
인도 대륙 대부분을 무굴의 지배권 내로 끌어들였다.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비(非)이슬람교도의 충성을 얻을 수 있는 계획을 세웠으며, 중앙의 행정력을 개혁·강화하고 동시에 재정구조를 중앙집권화했으며 세금징수과정을 재조직했다. 그 자신은 이슬람교를 결코 버리지 않았지만 다른 종교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슬람교도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파시교도·그리스도교도들에게도 자기 앞에서 자유롭게 종교적인 토론을 하도록 권유했다. 악바르 자신은 문맹이었지만 학자·시인 및 화가·음악가들을 지원하고 그의 궁전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초기생애
아부 울 파트 잘랄 웃 딘 무하마드 악바르의 혈통은 중세 북부 인도에서 주요한 정치적 지배층을 이룬 3대 민족인 투르크족에서 이어받았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도 그의 선조이다. 아버지 후마윤은 아프간의 반란자 셰르 샤 수르에 의해 수도 델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신드 지방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곧이어서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으로 가서 그곳의 샤에게서 약간의 군대를 빌렸다. 그는 셰르 샤 수르가 죽은 뒤 10년 만인 1555년에 왕위를 되찾았다.
당시 13세였던 악바르는 펀자브의 총독이 되었다.
후마윤은 1556년 사망시에 간신히 권력을 수립한 상태였다. 불과 몇 달 만에 후마윤의 총독들은 델리를 포함한 몇 개의 주요지역을 왕위를 노리는 힌두교 사제 헤무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한 군대가 역사적인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를 격파하고 델리에 이르는 길목을 장악하여 악바르의 왕위계승을 보장했다.
즉위 당시에 악바르의 통치영역은 펀자브 지방과 델리 주변지역을 넘지 못했으나 총리인 바이람 칸의 보필로 점차 그의 통치력은 강화·확대되었다. 1560년 바이람 칸을 은퇴시키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뒤 처음에는 여전히 왕실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절대군주가 되었다.
제국의 확장
악바르는 먼저, 비옥한 토지를 가졌고 빈디아 산맥을 통해 데칸에 이르는 교역로이며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국가인 말와를 공격해 함락시켰다(1561). 힌두라지푸트족은 험난한 산악지대인 라자스탄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민족으로서 열렬히 독립을 추구했으므로 이들에 대해서 악바르는 회유와 정복의 양면 정책을 취했다.
이슬람 왕들은 라지푸트족이 위험한 존재였지만 분열 때문에 약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562년 왕위승계 분규로 위협을 받은 암베르(자이푸르)의 라자 비하리 말이 악바르에게 자기 딸과의 혼인을 제안했다. 악바르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라자는 악바르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그의 아들들은 악바르의 시신(侍臣)이 되어 부를 향유했다.
악바르는 다른 라지푸트의 왕들에게도 이와 같은 봉건정책을 똑같이 시행했다.
그들은 악바르를 황제로 인정하고 공납을 바치고 필요할 때 군대를 제공하며 악바르와 결혼동맹을 맺는 한 세습 영지를 지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황제는 왕들과 그들의 자식들에게 시신이 되는 길을 열어주고 또 명예와 돈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악바르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왕들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메와르에서 오랜 전쟁 끝에 역사적인 치토르 성을 함락시켰을 때(1568) 악바르는 성의 주민을 전부 학살했다.
메와르는 항복하지 않았지만 치토르의 함락을 본 라지푸트의 다른 라자들은(마르와르국은 1583년까지 저항했음) 서둘러 악바르를 황제로 인정하고(1570) 결혼동맹을 맺었다.
악바르 정부의 특징 중의 하나는 힌두교도, 특히 라지푸트의 힌두교도들을 많이 기용한 일이었다. 라지푸트의 왕들은 무굴 제국에서 장군이나 총독과 같은 고위직에 올랐다. 비(非)이슬람교도가 순례할 때 바치는 세금과 군역을 대신하여 물던 세금(지지아)이 폐지됨으로써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차별대우가 완화되었다.
라지푸트의 왕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에도 방해받지 않고 통치해왔으며, 몇몇 라지푸트족과 여타 힌두교도들은 이전에도 이슬람 정부에 협조해왔다. 그러나 악바르는 행정기구의 모든 수준에서 이전의 어떤 이슬람 군주보다도 훨씬 더 힌두교도들의 협조를 얻었다. 영토가 더욱 확장되면서 그들에게 참여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 1573년 악바르는 인도와 서아시아 간의 무역을 지배하는 많은 항구가 있는 구자라트를 정복한 다음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벵골 지방으로 향했다.
독특한 문화를 가진 부유한 벵골 지방은 몬순기만 되면 범람하기 일쑤인 많은 강 때문에 델리에서 통치하기 어려웠다. 벵골의 아프간 출신 왕은 악바르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선왕(先王)의 정책을 거부했으나 1575년 복종을 강요받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1576년에 죽었고 악바르는 벵골을 병합했다. 치세 말년에 가서 악바르는 새로운 정복전을 일으켰다. 1586년에 카슈미르, 1591년에는 신드, 1595년에는 칸다하르를 정복했다. 무굴 군대는 이제 빈디아 산맥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도 반도의 데칸으로 침입했다. 1601년까지 칸데시, 베라르, 아마드나가르 지방의 일부 지역이 악바르 제국에 합쳐졌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악바르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아들 셀림의 반역적인 행동 때문에 골치를 썩혔다.
행정개혁
전근대 국가의 특성인 분열적 경향 때문에 당시 인도의 정부는 취약한 상태였다.
즉 군대는 개개 사령관들의 사병으로 변해 힘이 없었고 지방장관들은 그 지방에서 세습 지배자가 되는 경향이 강했다. 악바르는 포괄적인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이러한 분열경향에 대항했다. 이 개혁에는 2가지 근본적인 변혁을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 모든 관리는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황제가 직접 임명하고 승진시켰다. 둘째, 문관과 무관의 전통적인 구별이 철폐되었다. 문관 행정관들도 군대의 직위를 받았고 이로 인해 무관과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직위는 10명을 이끄는 지휘자에서부터 5,000명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등급이 나뉘었고 고위직은 무굴의 왕자들에게 할당되었다.
관리의 급료는 현금으로 국고에서 지불되기도 했지만 관리들이 토지를 할당받아 거기에서 토지세를 징수하여 자신의 급료를 제하고 나머지를 국고로 보내는 방식이 더 일반적이었다. 그 토지는 관리에서 관리로 자주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조치는 황제에 대한 관리들의 의존도를 높였다. 그러나 동시에 관리들로 하여금 짧은 임기 동안 그들이 담당하는 농민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세금을 착취하도록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이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황제가 능력있고 야심적이며 영향력있는 사람을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악바르는 많은 라지푸트의 왕들이 황제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악바르의 개혁은 중앙집권적 재정체계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각 주(州)장관(수바다르, 이후에는 나와브라고 불림) 옆에는 세금징수를 감독하고 회계결산을 하여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문관 행정관(디완)이 배치되었다.
직권 남용에 대한 보다 철저한 방지책으로서 악바르는 중요한 사항들을 정기적으로 황제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띤 기존의 보고자 망(網)을 재조직했다. 악바르는 또한 농민들에 대한 과도한 징세와 국가 재정의 손실을 막기 위해 보다 효과적으로 세금을 할당·징수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성은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에만 적용되었을 뿐이다. 라지푸트와 같은 조공국가의 토지와 무굴 관리에게 제공된 토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여행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악바르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농민들은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고위 관리들은 거대한 부를 향유했다. 화가·시인·음악가·학자 등은 많은 후원금을 받았고 사치산업이 번성했다. 악바르도 값비싼 직물과 장식품을 생산하는 정부 작업소를 지원했다.
성격과 평가
악바르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궁전 속에 살면서 호사스런 의식을 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과시했지만 궁전 밖의 여론을 듣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매일 아침 새벽에 그는 열린 창문 앞에 몸을 드러내 백성들의 인사를 받았다. 백성들로부터 작은 선물을 받을 때나,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불평을 늘어놓더라도 모두 들어주겠다는 그러한 자세를 보여줄 때의 그 우아한 모습에 대해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언급했다. 악바르는 육체가 강건하여 전장의 노고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키는 168㎝에 지나지 않았지만 압도감을 느끼게 했고 문맹이었지만 강력하고 창의력있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궁전에 초대하여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편견 없이 많은 질문을 했는데 이때문에 선교사들은 그가 개종하려는 줄로 오해한 일도 있었다. 악바르는 이슬람 법에 대한 논쟁을 하고 있던 궁전의 이슬람 신학자들에게 자신을 중재자로서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그의 체계적인 접근 방법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이때문에 종교의 정통교리는 손상을 입었다.
그는 이슬람교도·힌두교도·파시교도·그리스도교도 사이에 종교 논쟁을 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정통교리에 대한 더 큰 손상을 주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악바르와 함께 신비주의 취향을 같이했던 조정 대신들의 작은 집단 속에서 계속되었다. '신성신앙'(Dῑn-e Ilāhῑ)이라고 알려진 이들의 교리와 의식은 그 중심을 악바르 자신에게 두었지만, 이같은 신앙 발전에 대해 정치적 동기만을 찾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델리 근처의 파테푸르시크리에 수도를 건설하려고 1570년에 시작해 1586년에 포기한 사업으로 미루어보아 악바르가 당시 가졌던 광범위한 자원을 살펴볼 수 있다(악바르 시대건축). 힌두교와 이슬람 건축양식의 결합은 악바르가 장려한 두 문화의 교류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산스크리트 고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도록 했으며 조정 대신들에게 삽화가 든 사본을 나누어주었다. 또한 그는 예수회가 가져온 유럽의 회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궁정화가들은 독특한 무굴 양식(물질 세계의 생생한 묘사가 특징임)에 유럽의 사실주의 기법과 원근법을 도입해 그의 통치기간 동안 발전시켰다. 악바르의 치세는 문화간의 만남에서 놀라운 결과를 낳은 좋은 사례이다.
또한 악바르 정부는 강력하고 인정이 많으며 관대하고 계몽된 이상적 정부의 모범으로 자주 묘사되어왔다. 인도처럼 지리적으로 광대하고 사회적으로 복잡한 나라에서 효율적인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라는 수단이 필요한데 악바르는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것을 충족시켰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