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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
아프가니스탄은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었다. BC 6세기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일부인 키루스 2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일부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 박트리아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 2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에프탈 왕조와 사산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 왕조시대에는 이슬람교가 튼튼히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의 침략을 받았으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근대 아프가니스탄
1700년대초 페르시아 군주 나디르 샤에 의해 무굴 제국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나디르의 경호대장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굳히고 왕위를 계승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177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 또는 종족 단위 사회로 회귀하려는 경향과 러시아·영국의 제국주의적 음모로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전쟁(1839~42, 1878~80, 1919)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점령을 시도한 영국에게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기본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주제 아래 1930년대부터 계속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으나, 1970년대 정당정치가 안정을 잃게 되고 1973년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77년 파르캄당과 좌익 칼크('대중'이라는 뜻)당이 연합하여 PDPA를 결성했다. PDPA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소련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반면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입헌군주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단체와 일종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단체로 나누어졌다.
이 두 정파는 1978년에 함께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점차 두 정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들의 마르크주의적인 개혁정책으로 농촌에서 큰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1979년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PDPA를 무너뜨리고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했으며,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달아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1988년 5월부터 1989년 2월 사이에 10만 명의 소련군이 철수했으나, PDPA가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PDPA와 반군 사이의 무력투쟁이 끊이질 않았다. 1992년 4월 마침내 반군 세력이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의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14년(1978~92)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났다.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지만 평화가 정착되지는 않았다. 민족이나 종교적 분파에 따라 나뉜 여러 게릴라 세력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과도기에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브가 툴라 모자데디가 1992년 6월 게릴라 지도자들의 회의기구를 이끌던 부라누딘 라바니에게 권력을 넘겼으나, 유혈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다.
근본주의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이슬람당은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또한 시아파 이슬람교 당파 8개가 연합한 통일당은 이란의 지원을 받았는데 과도정부에 대해 권력 분점(分店)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무부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권을 장악한 측이 과거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이탈리아·불가리아가 자국 외교관들을 철수시키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고, 파키스탄과 이란에는 여전히 수백 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었다. 1992년 12월 30일 1,335명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에서 라바니가 2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에 대해 10개의 주요 반군 세력 중 5개가 의회를 비난하며 라바니를 대통령에 선출한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오로지 이슬람교도에게만 정부의 일을 맡겼고 비(非)이슬람 기구 설치를 금지했으며 방송도 이슬람 율법에 따르도록 했다.
국방장관 아흐메드 샤 마수드 휘하의 정부군과 헤크마티아르를 따르는 헤즈브 이 이슬라미 사이에서 주로 발생한 끝없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1993년 5월 22명으로 구성된 내각이 짜여졌으며, 수도 카불에 있는 마수드의 건물을 점령한 헤크마티아르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은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자금 등의 원조를 요청해 국가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1994년 1월 헤크마티아르의 군대와 아브드 알 라시드 도스탐 장군의 군대가 연합해 수도 카불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카불은 잿더미가 되었고 카불 인구 200만 명 중 150만 명이 이 지역을 탈출했으며 카불 바깥지역에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다. 1994년 3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 튀니지의 전(前)외무장관 마흐무드 메스티리를 대표로 한 평화사절단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는 등 평화정착에 노력했으나 성과는 별반 없었다.
라바니 대통령의 임기가 1994년 6월로 끝이 났지만 그는 권좌를 내놓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은 그의 임기를 6개월 연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정국이 계속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중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1994년 탈레반을 결성, 라바니 대통령과 다른 반군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를 표방했다.
탈레반의 정부 장악
파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세워진 이슬람 신학교 마드라샤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탈레반이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 지방에서 무력활동을 전개한 이후, 1996년말 보수적 이슬람 분파와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슈툰족의 지원으로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부의 타지크족, 서부의 우즈베크족, 중부의 하자라족 등 비파슈툰족들은 파슈툰족으로 구성된 탈레반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해왔던 파슈툰족의 집권 연장이라고 여겨 이에 대항했다. 탈레반은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 정책으로 이들을 제압했다.
탈레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라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표방하며 여성을 억압하고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특히 2001년 3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탈레반 축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를 당하자 미국은 우사마 이븐 라딘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집권 탈레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 주도의 일부 서방국가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세력인 북부동맹이 이 전쟁에 합세한 끝에 탈레반은 붕괴되었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온건 이슬람주의자였던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는 국명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탈레반의 잔여 세력에 의한 정치적 영향력과 국지적인 테러가 이어지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다. 2014년에는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유럽 연합(EU) 등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축출된 후에도 탈레반은 남부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지역에서 지속적인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에 따라 미군의 주도 아래 탈레반 세력과 무력 대립이 지속되었으나 2020년 2월 29일 미국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미군의 철수를 예고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 평화협정에 참여하지 않음에 따라 탈레반이 이후 아프가니스탄 정국에 미칠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가중되었다.
탈레반의 재 장악
2020년 4월에 있었던 포로 협상이 결렬된 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평화협정에 따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철수를 추진하자 탈레반 세력의 지역 점거가 계속되었다. 2021년 4월, 미국 바이든 정부가 9월 11일 이전에 미군의 철수를 완료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2021년 8월 31일을 목표로 미군의 철수가 진행되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 점령을 앞둔 상황에서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고, 8월 30일 미군이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은 다시 탈레반이 장악하게 되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을 수립하고 다시 이슬람 신정을 기반으로 한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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