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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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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6. 1. 5, 쾰른(지금의 독일에 있음)
사망 1967. 4. 19, 독일 뢴도르프
국적 독일

요약 아데나워는 공산진영의 도발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NATO에 적극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를 포함한 이웃나라들과의 화해에 노력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쾰른 시의 시장으로 뽑혔다. 1949년 기독교민주당의 당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총리자리에 올랐다. 사회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정책들도 인정함으로써 국론을 통일했고, 서독이 유럽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덕에 서독은 1951년 유럽 위원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1954년에 주권국가로 인정되며 NATO에 가입, 1957년에는 유럽 경제공동체의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 오랫동안 소망하던 독일-프랑스 상호협력 조약을 프랑스의 드골과 체결한 후 총리직을 사임했다.

아데나워(Konrad Adenauer)

ⓒ Young/wikipedia | CC BY-SA 3.0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이다.

기독교민주당의 당원이며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을 지지했으며 전쟁중 독일의 적대국들,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초기시대

쾰른 지방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가톨릭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의 집안은 수입이 많지 않았으므로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았고 경건한 신앙심을 강조했다. 프라이부르크·뮌헨·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1906년에는 쾰른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중이던 1917년에는 쾰른 시의 시장으로 뽑혔다. 1933년까지 시장직에 있으면서 항만시설, 그린벨트, 스포츠 시설, 전람회 시설 등을 마련했으며 1919년에는 쾰른대학교를 재건하는 데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1918년 라인란트가 새 독일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기를 희망했지만 1926년 마침내 영국이 쾰른뉴에서 철수하자 이 도시와 그 일대는 프로이센 라인 주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1918년 프로이센 의회가 해체되기 전부터 그 의회의 상원의원이었던 아데나워는 1920년부터 프로이센 의회의 중앙기구인 슈타트라트의 의원이 되었고 1928년에는 그 의회 중앙기구의 의장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가톨릭주의를 표방한 중앙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그는 모든 공식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간헐적인 박해를 받았던 그는 1944년 강제수용소로 송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점령당국 가운데 미국은 그를 쾰른 시의 시장으로 복직시켰으나 1945년 6월 그 도시를 점령한 영국은 같은 해 10월에 그를 시장직에서 해임시켰다. 2번째로 시장직에서 강제 해임되었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같은 해임이 그에게 더욱 큰 사명감을 가져다주었다.

총리시절

전쟁이 종식되기 이전부터도 독일에서는 새로운 정당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 정당은 독일기독교민주당연합이었는데 가톨릭교도와 신교도가 오랜 불화를 해소하고 나치즘에 대한 공동전선을 구축, 나아가 정부운영에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반영하고자 결성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시장직에서 해임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정당의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1946년 그는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독일지역에서 그 지역 기독교민주당의 조직책임자가 되었다.

기독교민주당은 연합국 측이 점령하고 있던 4개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소련이 연합국 조정위원회에서 자주 반대의견을 내세워 서방 국가들의 움직임을 견제하자 서방측 연합국들(미국·영국·프랑스)은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3개 지역에 연방 형태의 정부조직을 마련해주기로 결정했다. 아데나워는 임시의회 의장이 되어 독일연방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임시 헌법을 마련했다. 1949년 아데나워는 서독 전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민주당의 당수가 되었다. 새로운 정부 아래서 치러진 첫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과 연합세력인 기독교사회당은 총 402석의 연방의회 중 139석을 얻었다.

그는 가까스로 연립정부를 구성했으며 1949년 9월 15일 연방의회에서 한 표 많은 과반수로 그의 총리 인준을 받았다.

총리가 된 아데나워는 사회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평등한 대중사회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의 정치적 신조는 법의 지배를 받는 개인주의였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자유로운 지적·경제적 발전을 위한 최적의 기회를 보장하고 동시에 안정된 치안 상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의 정치강령은 그 일부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정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데나워의 정치적 신념을 부정하는 측면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같은 도전에 대하여 아주 실용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는 다른 국내 정책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양보함으로써 국론을 통일할 수 있었고 서독이 유럽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총리시절 동안 그의 주된 관심이 된 것은 외교분야였다. 그는 유럽의 중심부에 공산세력이 침투하는 것을 서방과 서방의 가치관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보았다(공산주의). 그는 공산세력과의 평화 공존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공산진영의 도발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개인주의적 법치주의와 전체주의적 독재체제, 그리고 인본주의적·그리스도교적 원칙과 공산주의적 사회체제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억지정책의 주창자가 되었다. 그결과 NATO의 결성에 독일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고 유럽 방위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나라들, 특히 프랑스와의 화해에 온 힘을 기울였다. 아데나워 재임시의 중요한 업적을 연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서독은 유럽 위원회의 준회원 자격으로 가입했으며, 1951년에는 서독 외무부를 창설하여 그 자신이 1955년까지 외무장관직을 겸임했다. 1951년 유럽 위원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유럽 석탄철강공동체의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1952년에는 유럽 방위공동체를 발족했고, 1954~55년 유럽 방위공동체가 해산되자 서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게 하여 NATO에 가입했으며 서방국가로부터 재무장의 승인을 얻어냈다.

1957~58년에는 유럽 경제공동체(EEC)의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한편 아데나워의 꾸준한 인기는 1953, 1957년의 2차례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그대로 드러났는데, 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의 연합세력은 연방의회에서 압도적인 과반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아데나워는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총리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 내에서 그가 독일을 유럽 경제공동체에 가입시킨 조건을 놓고 반대의견이 나왔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에르하르트는 1949년부터 경제장관직을 맡으면서 서독의 경제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1957년에는 부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그의 불화는 점점 깊어져 1959년 아데나워는 그가 총리직을 영원히 승계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 1961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의 연합세력은 연방의회에서 상당수 의석을 잃었다.

아데나워는 다음 정부를 구성하려면 자유민주당을 연립정부에 끌어들여야 할 입장이었다(1949, 1953년에 자유민주당을 연립정부에 끌어들인 일이 있었으나 1957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음). 그러나 자유민주당은 그가 의회 임기 만료 전에 총리직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면 연립정부에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아데나워는 이를 받아들여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1963년 그가 오랫동안 소망하던 독일-프랑스 상호협력 조약을 프랑스의 드골 장군과 체결한 후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그뒤를 이어 에르하르트가 총리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1966년 3월까지 기독교민주당의 당수직을 맡았다.

아데나워 재임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독일을 중립화시키고 서방권과 공산권 사이에서 비동맹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같은 정책을 취하면 안보에 치명타가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아데나워와 그의 당은 여러 차례에 걸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말년에 아데나워는 독일의 통일을 위해 힘쓰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물론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서, 그는 독일의 통일 과업은 서독 정부보다는 독일의 분열을 가져온 강대국들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입장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데나워는 미국과 유럽의 주요정치가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와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과는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뛰어난 언어능력은 그가 정계에서 활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보통 사람이 들어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언어를 구사했으며 간단명료한 내용은 연설의 권위를 높였다. 개인생활 면에서도 소탈하고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번 결혼하여 2번 다 상처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주요정계 지도자, 프랑스의 정치인,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국가원수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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