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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720년에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경종은 후사가 없고 병이 많았다. 그러자 노론4대신은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소론측은 반대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조성복의 상소를 통해 세제 청정을 주장했다. 이에 경종은 청정을 명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환수했으며, 뒤에 여러 번 번의를 거듭했다. 노론·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그해 12월 사직 김일경 등이 소를 올려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행하게 한 노론4대신을 유배보냈다. 그뒤 1722년 3월 노론측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소론측은 이를 기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하게 하고 수백 명의 노론을 제거했다.
신축(辛丑)·임인(壬寅) 두 해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하며, 일명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少論)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그러자 당시의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소론측은 반대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세제 청정(聽政)을 주장했다. 이에 경종은 청정을 명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환수했으며, 뒤에 여러 번 번의를 거듭했다. 그동안 노론·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결국 그해 12월에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 등이 소를 올려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행하게 한 노론4대신을 파직시켜 유배보냈다. 이외에도 다수의 노론측 인물들이 삭직되었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뒤에도 소론의 강경파들이 노론숙청을 요구했는데, 마침 1722년 3월 노론측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소론측은 이를 기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하게 하고, 수백 명의 노론을 제거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노론의 추대를 받았던 영조가 즉위하자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당쟁으로 일어난 신임사화를 생각하고, 노론·소론을 함께 등용하여 당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하는 등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불러들이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켰다.→ 정미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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