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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다른 표기 언어 申叔舟 동의어 범옹, 泛翁, 희현당, 希賢堂, 보한재, 保閑齋, 문충, 文忠
요약 테이블
출생 1417(태종 17)
사망 1475(성종 6)
국적 조선, 한국
종교 유교(성리학)
본관 고령(高靈)
시호 문충(文忠)
범옹(泛翁)
희현당(希賢堂), 보한재(保閑齋)

요약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의 창제, 보급과 국가 중요서적의 찬수에 참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범옹, 호는 희현당, 보한재이며 세종 20년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해 전농시직장을 지냈다. 1443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러 계해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두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중용됐다. 세조의 즉위과정에 가담하고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점 등에서 사육신과 뚜렷이 구별되는 삶을 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보급과 국가 중요서적의 찬수(撰修)에 참여하는 등 조선 전기 문물제도의 완비에 기여했다.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 S0ch1/wikipedia | Public Domain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對馬島]에 들러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명나라 한림학사로서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찾아 10여 차례 요동을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해 논의했으며, 명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면서 운서(韻書)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연구했다.

특히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에 능통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이어 장령·집의·부제학 등을 두루 지냈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1453년 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중용되어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의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가서 맡은 일을 완수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이 공으로 토지·노비·안마(鞍馬)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겸 판병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이어서 노산군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457년 우의정, 1459년 좌의정에 오르고, 1460년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2차례에 걸쳐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던 여진족을 크게 소탕했다. 1462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이끌었다. 이해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에는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을 맡았다.

그는 세조의 즉위과정에 가담하고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사육신(死六臣)과 뚜렷이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

이 점에서 후대에 종종 변절자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를 갖추어 조선 초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것은 이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세종 때 훈민정음의 창제와 발전·보급에 공헌했음은 물론, 〈동국정운 東國正韻〉·〈사성통고 四聲通攷〉 등 운서 편찬에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도 국가의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세조실록〉·〈예종실록〉·〈동국통감〉·〈국조보감〉·〈영모록 永募錄〉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또한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과의 교류에 도움을 주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과 〈북정록 北征錄〉·〈사성통고〉 등이 있고, 글씨로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의 찬문과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신숙주(申叔舟)가 성종(成宗)의 명을 받아 작성한 일본국과 유구국(琉球國)에 대한 정보를 기술한 한문 역사서

ⓒ 申叔舟/wikipedia | Public Domain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숙주 묘

신숙주와 부인의 묘,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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