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삼국시대에 신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질그릇.
지역적으로는 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신라토기의 분포범위도 확장된다.
그결과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에서도 신라토기가 제작되어 사용된다. 신라토기는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서 3세기경까지의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의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공통의 기반 위에서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로 나뉘어 발전했다.
가야토기는 주로 낙동강 서쪽지역에서 발전한 양식이고 신라토기는 낙동강 동쪽에서 발전했다. 경주 이외에 창녕·양산·대구·성주·안동·의성 등지에서도 각기 독특한 토기를 제작·사용했는데 이러한 토기들도 넓은 의미에서 신라토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신라와 가야와의 관계, 신라의 성장과 주변세력에 대한 정복·통합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토기는 대부분 흑색·흑회색·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쇳소리가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1,200℃ 이상의 고온으로 환원염소성(還元焰燒成)된 결과이다.
그중에는 바탕흙[胎土] 속의 규사(硅砂) 성분이 높은 온도 때문에 유리질화하여 표면이 반들거리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신라토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굽다리접시[高杯]와 목단지[長頸壺]이다. 가야토기는 역시 굽다리접시와 목단지가 대표적인 기종(器種)이나 양자는 약간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가야토기에 비해 몸통[杯身]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문양은 양자 모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에서도 차이가 있다. 목단지의 경우 어깨와 몸통이 이어지는 부위가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에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는 점이 다르며 바닥에 굽다리[臺脚]가 붙은 점도 신라토기의 특징이다.
아울러 신라의 굽다리접시와 목단지 중에는 종종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토우(土偶)를 부착한 것이 있다. 이외에도 단지[壺], 그릇받침[器臺], 파배(把杯), 동물이나 물체를 표현한 상형토기(像形土器) 등이 있으며 산화염소성(酸化焰燒成)되어 적갈색을 띠는 토기들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토기들은 대부분 무덤에 부장된 것들로서 실제 생활에 사용하기보다 무덤에 넣기 위한 명기(明器)로서 제작된 것들이 많다.
경주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들은 신라왕족의 무덤으로서 내부에는 막대한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있다. 6~7세기에 접어들면 박장(薄葬)의 관념이 널리 퍼지면서 무덤에 많은 양의 토기를 부장하는 모습은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불교식 화장(火葬)의 유행으로 뼈단지[骨壺]가 사용되기도 한다. 굽다리접시와 목단지의 표면에는 인화무늬[印花紋]가 찍힌 경우가 많으며 굽이 점차 짧아지게 된다.
이러한 토기들이 통일신라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로는 안압지 출토품들을 들 수 있다. 여기의 토기들은 무덤부장용이 아니라 실생활에 사용하던 토기들로서 굽다리접시 외에도 사발[盌]·장군[橫缶]·편병(偏甁)·시루[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