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신라의 건축 가운데 목조건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석조건축인 첨성대, 분황사석탑, 그리고 사지(寺址)를 포함한 건물지가 일부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추정해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도성인 금성과 월성(月城) 안에 상당한 규모의 궁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유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절터로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지·황룡사지·분황사지(芬皇寺址)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황룡사지는 장기간의 발굴을 통해 그 방대한 규모와 독특한 가람배치가 밝혀졌다.
남북축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 등을 배치한 것은 다른 것과 같으나, 탑 좌우에 종루(鐘樓) 및 경루지로 추정되는 방형 건물지가 있고, 또 금당 좌우에 다시 장방형의 건물지가 병립해 있는 특이한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은 고구려의 가람배치와 관련이 있으며, 금당의 기단 형식이나 기단 위 초석 밑 또는 벽선 밑의 보강기법도 고구려에서 볼 수 있는 것임이 밝혀져 신라 초기의 목조건축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의 목탑은 백제에 도움을 청해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에 의해 건립되었음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불탑은 흥륜사나 황룡사에서처럼 목탑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탑을 모방한 모전탑(模塼塔)인 분황사탑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 세워진 것으로 원래 7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3층밖에 남아 있지 않다. 기단은 매우 크고 높으며 네 귀에 사자가 배치되어 있고, 1층 4면에는 문을 달아 감실을 만들어 백제의 석탑과는 차이를 보여준다. 이 탑의 1층 탑신 감실의 문 양옆에 조각된 화강암의 인왕상은 연대가 분명한 신라조각으로 신체묘사의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