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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결국 소포클레스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그가 쓴 비극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해마다 열리는 디오니소스 대축제에서 상연할 희곡을 쓰고, 연극에 삽입할 음악과 무용을 고안하고, 그의 연극에 출연할 모든 배우와 합창단원들을 지휘하고 훈련시켰으며, 때로는 직접 역을 맡아 연극에 출연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65년을 보냈다. 그는 28세 때인 BC 468년에 축제용 극작 경연대회에서 위대한 아이스킬로스를 물리쳤고, BC 450년까지 계속해서 24편의 희곡을 썼다. 그리고 그때쯤 그는 이미 전통적 비극 형식을 부분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형식을 각각 완전한 형식을 갖춘 3편의 희곡으로 바꾸었고, 아이스킬로스는 대사를 말하는 배우 2명을 채택했지만, 그는 여기에 3번째 배우를 추가하여 극적 갈등의 범위를 넓혔고, 합창단의 비중을 줄였다. 이러한 혁신은 비극의 근본적인 기법과 격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혁신을 통하여 소포클레스는 그의 독특한 표현수단, 즉 응집력과 지속적 긴장감을 지닌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성격묘사와 의미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1시간 남짓한 복합극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Poetics〉(BC 335경)에서 소포클레스를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높이 평가하고 〈오이디푸스 왕〉을 그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것은 바로 이처럼 완벽한 형식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축제를 위해 통틀어 123편의 희곡을 썼다.
축제용 극작 경연대회에 참가하도록 선발된 작가들은 한 번의 축제에 각각 4편씩의 희곡을 상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그는 30여 차례나 대회에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그는 유명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창조적이었다. 그는 동시대인이면서 그보다 선배인 아이스킬로스나 후배인 에우리피데스보다 훨씬 오래 활동했다.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썼고, 두 사람보다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아이스킬로스는 13번 정도였고, 에우리피데스는 5번이었던 반면, 그는 무려 24번이나 우승했음). 그리고 당시는 문학과 그밖의 예술이 전무후무할 만큼 화려하게 꽃핀 시대였다.
그가 쓴 비극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7편뿐이다(그밖에 절반만 남아 있는 가벼운 사티로스 극, 단편 일부, 그리고 90개의 제목이 남아 있음). 이 작품들은 소포클레스의 내적 경험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그의 태도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각 작품이 언제 씌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면, 그의 발달 과정을 순서대로 개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2~3편의 작품에 대해서만 상당히 확실한 제작 연도가 알려져 있고, 이들 작품은 변화나 발전보다는 변함없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일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 7편의 관점은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소포클레스의 주요주제는 위기, 특히 고통이나 그 고통의 절정인 죽음의 위기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불행과 고통 및 죽음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며 '슬프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불행과 고통 및 죽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변화(거짓된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낳거나 변화의 조짐이 된다. 죽음 같은 고통(정신이나 육체의 고통, 또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은 더 커진 이해력과 더불어 '재생'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디오니소스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황홀경과 번식 및 성장의 변형력(디오니소스 연극 대축제 자체가 이 힘을 찬양하는 축제였음)과 비슷하다. 이것은 또한 가까운 엘레우시스에서 열린 신비의식(비밀의식과 환상)의 정신적 기본내용과도 비슷하다. 소포클레스는 이 신비의식에 입회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우주
소포클레스의 희곡은 (신이나 자연력의 작용보다) 대표적인 인간상들간의 상호작용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등장인물과 관객을 시작과 변화의 과정 속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개나 유형은 많은 등장인물(그리고 관객)의 경험뿐만 아니라 각 희곡의 형태를 낳은 바탕이기 때문에, 인간상 자체보다 더 근원적이다. 이 역동적 유형은 소포클레스가 생각했듯이 우주 전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세계관, 또는 우주관은 그리스도교나 근대과학의 우주관을 비롯한 어떤 우주관과도 다르며, '신'이나 '역사', 또는 '물질'이나 '운명'과 비슷한 것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
그의 우주관은 다원적('신성'·'시간'·'자연'·'필연성' 같은 다양한 힘의 상호작용, 또는 다양한 힘 사이에 생기는 긴장관계)이다. 우주는 이런 힘들이 질서 있게 조정되거나 율동적인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것이며, 여기에서 비극의 줄거리에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기쁨과 절망, 삶과 죽음의 엇갈림이 나온다. 이 우주는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신적'인 동시에 '자연적'이고, '비개인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우주를 응집력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 보든 추진력으로 보든 우주는 영속성을 갖고 있다. 희곡에서 우주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신들이다.
신들은 영원한 힘과 현실의 구조를 구현한 화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이런 힘과 구조에서 차단되어 있고 시간과 변화 및 고통과 죽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의 질서와 확실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과 고통 및 죽음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의 주요주제이다.
7편의 비극은 각각 이 과정의 한 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과정 전체도 어렴풋이 보여준다.
주인공은 줄거리 속에서 일찍 죽을 수도 있다(아이아스나 안티고네처럼). 주인공이 죽은 뒤, 희곡의 대부분은 그 죽음이 등장인물을 어떻게 정당화했으며, 그것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살아남은 사람들(관객을 포함하여)에게 어떻게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또는 고통이 갑자기 출현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때까지의 사건전개와 동기의 뒤섞임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도 있다(〈오이디푸스 왕〉, 〈트라키스의 여인들〉·〈안티고네〉의 크레온). 또는 불행하게 지속되다가 마침내 잔인하지만 꼭 필요하고 정당한 행동으로 끝나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다(〈오이디푸스 왕〉의 끝부분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전체에서 오이디푸스가 한 행동, 〈엘렉트라〉·〈필록테테스〉).
죽음
우주의 작용은 생명을 낳고 인간성을 성취하지만, 항상 죽음과 고통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렵다.
소포클레스의 어떤 등장인물들은 당연히 끔찍한 시련을 피하려고 애쓰며, 어떤 등장인물들은 거기에 압도당한다. 또 어떤 등장인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 그 시련에 맞서서 대항한다(오이디푸스, 안티고네, 필록테테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시련에 대항해도, 주인공(그리고 일부 조역들)은 결국에는 모두 죽는다. 데이아네이라, 이오카스테, 에우리디케, 하이몬, 그리고 콜로노스의 신성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오이디푸스처럼 대다수의 주인공은 육체적으로 죽는다.
또한 다른 주인공들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예를 들어 동생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엘렉트라, 자기 섬에 남겨질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필록테테스, 아들과 아내를 잃은 크레온,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오이디푸스가 그런 주인공이다. 그리고 적어도 두 사람은 상징적으로 죽는 동시에 육체적으로도 죽는다. 굴욕적으로 체면을 잃은 아이아스의 삶은 살 가치가 없어지지만, 그는 자살을 통해 고귀해진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부당한 포고령에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은 결국 감옥에서의 자살을 예시해준다.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죽음'은 가장 의지가 확고한 등장인물의 예상도 초월하여 나타나는데, 이것은 진리와 보다 더 가깝게 접촉하여 자아의 새로운 영역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방법에 있어서 죽음은 '삶'의 포기에 의해 더 진실한 인간, 보다 더 본질적인 자아를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아를 초월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증거가 된다.
오이디푸스와 아이아스 및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여러 주인공들은 불의 시련을 겪는 인류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불 속에서는 모든 점에서 더 커진 인물이 나온다. 불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더 사납고 더 부드러우며, 더 강인하고 더 복잡하고 더 잔인하고 더 고귀해진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사실상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그들은 '신화적' 자아가 된 것이다.
신화적 진리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신화는 진리를 상징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의 신화나 유형을 배우고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지식과 수용은 일찍이 주인공을 좌절시킨 가혹한 경험을 분명히 설명해준다(필록테테스, 2편의 희곡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헤라클레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트라키스의 여인들〉에 나오는 데이아네이라). 또는 신화적 유형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에만 분명히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만 특정한 등장인물은 그 신화적 유형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아이아스, 엘렉트라, 안티고네). 예언자들과 신탁은 모든 희곡에서 이 신화적 진실을 밝힌다.
게다가 소포클레스의 모든 비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우주의 작용은 그것의 신화적 유형과 동등하다. 그러나 소포클레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얼마나 자유롭게 각색하여 희곡을 만들었으며, 그가 생각해내어 이용한 신화가 그 자신의 특정한 주제와 어떻게 뒤얽혀 있고,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의 윤곽을 제시하기는커녕 그 가닥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인 희곡을 낳았는가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등장인물들이 본질적·신화적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소포클레스가 상상해낸 오이디푸스는 전설에 나오는 모순된 '오이디푸스'('인간들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비참한 인간',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장님, 폭군, 왕, 범죄자, 추방자)이지만, 동시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공격적이면서도 너그럽고, 오만하고, 진리에 몰두하고, 열정적인 인물)가 되었다.
자유와 책임
소포클레스의 등장인물들은 우주를 분열시키는 작용과 맞선다.
따라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견해나 모든 장면에서 서로 생생하게 대결하는 개인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와 자율성 및 책임을 갖느냐에 대한 그의 견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소포클레스는 이런 문제들을 제거하는 대신 극화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가정일 것이다. 그의 비극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는 뚜렷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대다수가 자유 행위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와 보편적 원리, 도덕적 특성, 사회적 역할 따위를 보여주는 '전형'이기도 하다.
소포클레스에게는 자유로운 결정과 우주의 필연성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의 확대(BC 460년대 이후)와 더불어 개인의 자율성도 발전했을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자율성을 무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사회적 진리가 참신함과 다양성 및 개성으로 인해 희미해지는 것을 보는 대신,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영원히 새로운 그 진리의 의미를 재발견했다. 그의 우주는 결국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 인간을 포함한다. 신이나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리 이질적으로 여겨지고 잔인해 보일지라도, 그것의 진리는 인간 존재의 신비로운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숙명이 마치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된 것인 양 숙명을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그는 그 숙명이 자신의 현실임을 깨닫는다. 인간은 진실을 자기 '밖'에 놓고 우주와 싸움으로써 진실에서 벗어난다. 인간이 단순히 '개인'이나 '자아'라면, 이 싸움은 인간을 파멸시킬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 싸움이 자아를 파괴하지만 그럼으로써 파괴할 수 없는 정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포클레스가 죽은 뒤에 초연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이 점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불행과 쇠약과 고통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이 곤경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가 다시 태어난 것을 알려주는 징후는 말하는 능력(설득·명령·예언)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새로 얻은 인식을 통해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우뚝 서서, 길을 '보고' 비밀 장소로 다른 사람들을 안내한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자, 오이디푸스는 영원한 수호신으로 그를 바꾸어줄 초자연적인 죽음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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