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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세르반테스는 여생의 대부분을 이전의 격동과 위험스러운 시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보냈다.
그는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하며 항상 돈에 쪼들렸던 것 같다. 〈돈 키호테〉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귀국한 뒤 곧 그는 물가가 올랐으며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가족과 같은 중류 계층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옛 일이 되고 말았다. 세르반테스의 무훈에 대한 기록은 이제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사업에 따르는 여러 군데 행정직에 지원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고작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581년 왕의 특사로 잠시 오랑에 파견되었던 것뿐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궁정을 따라 새로이 병합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갔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무렵 젊은 유부녀 아나 데 비야프란카(또는 아나 프란카 데 로하스)라는 여성과 연애 사건을 일으켰고, 그결과 딸 이사벨 데 사아베드라를 낳았다.
이사벨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고 뒤에 그의 집에서 자랐다. 그후 1584년 자신보다 18년 연상의 여인인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 이 팔라시오스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라만차의 에스키비아스 마을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애정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세르반테스가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결혼이 그럭저럭 괜찮은 동반 관계로 자리잡았다고 보아서 안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가 당시 쓰고 있던 시나, 최초로 출판된 소설이자 새롭게 유행하던 전원 로맨스 〈라 갈라테아 La Galatea〉(1585)의 등장인물들이 카탈리나에게서 영감이나 모델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 출판업자 블라스 데 로블레스는 이 작품에 1,336레알을 지불했는데, 첫 작품치고는 만족할 만한 값이었다. 이 작품을 아크콰비바의 친구 아스카니오 콜론나에게 헌정한 것은 후원을 얻으려는 시도였으나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 루이스 갈베스 데 몬탈보를 위시한 문학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 책은 세르반테스에게 고급 독자층 사이에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작가의 생전에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다시 발간된 것은 1590년의 리스본판과 1611년의 파리판뿐이었다. 〈라 갈라테아〉는 이야기 중간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여러 번 의사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아 세르반테스는 분명히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스페인 연극의 황금기가 막 시작되려던 이무렵에 세르반테스는 극작에도 손을 댔다.
1585년 가스파르 데 포라스라는 극장 지배인과 2편의 극을 쓰기로 계약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일찍이 썼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술회했던 〈혼동 La confusa〉이다. 수년 뒤에 그는 이 시기에 20~30편의 희곡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적어도 관중의 야유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것은 〈라 누만치아 La Numancia〉·〈알제리의 교통〉 2편뿐이다.
그는 9편의 희곡을 들고 있으나, 그중 몇몇 작품은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뒤에 〈8편의 새 희곡과 8편의 막간극 Ocho comedias, y ocho entremeses nuevos〉(1615)에 실린 작품들의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주요도시에는 상설극장들이 설립되고 있었고 전에 없이 오락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곡 시장은 급성장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로페 데 베가는 스페인 연극에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해 그의 작품에 비하면 세르반테스의 것들까지 포함한 이전의 모든 희곡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어색한 것이 되었다.
극작가로서는 실패할 것이 뻔했음에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극작품을 받아줄 지배인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1587년경에는 글을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해져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는 무적함대를 위한 식량조달관이 되었다. 농촌에서 억지로 옥수수와 기름을 차출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결국 이것이 그의 고정직이 되었다. 일 때문에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 일대를 돌아다녀야 했고, 이는 작품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미로처럼 복잡한 재정적 문제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장부상의 수지를 맞추지 못할 때는 상관들과 거듭 반복되는 불화를 겪었다. 또한 시나 교회 당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고, 교회로부터는 여러 차례 파문을 당했다. 문제시된 회계와 협상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참패한 뒤에 스페인의 상업 중심지이자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세비야로 갔다.
1590년 서인도제도 의회에 지원하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비어 있는 4개의 요직 가운데 하나라도 얻기 원했으나, 그의 청원은 깨끗이 거절되었고 회계에 대한 분쟁과 급여 체불은 계속되었다. 그는 문단과 어느 정도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권의 책을 샀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것들을 읽으려 시간을 냈음이 분명하다. 1592년에 로드리고 오소리오라는 극장 지배인에게 6편의 희곡을 써주기로 계약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조달관 업무는 계속되었고, 분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1592년 9월 카스트로델리오에 며칠간 감금되었다.
1594년 마드리드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 다시금 안달루시아로 돌아가 체납된 세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승진에 해당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이전 일보다 나을 바가 없었고, 전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곤란과 분쟁이 따르는 일이었다. 세르반테스에게는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
아마도 상호 합의에 의해 그 임무는 1596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해에 그는 사라고사에서 열린 시 경연대회에서 1등상(은수저 3개)을 수상한 바 있었고 세비야로 돌아와 비로소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행실에 관한 심술궂은 풍자 소네트나 이어서 당시에 서거한 국왕에 대한 은근히 불경스런 소네트가 씌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다시금 그는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1597년 여름에는 3년 전에 맡았던 회계에 차질이 생겨서 세비야 왕실 감옥에 감금되어 1598년 4월말까지 그곳에 있었으며, 세르반테스는 그곳에서 〈돈 키호테〉를 구상한 듯하다.
이후 4, 5년간의 행적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세비야를 떠나 아마도 잠시 에스키비아스와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분명히 바야돌리드(1601~06년 왕의 궁정이 그곳에 세워졌음)에서 〈돈 키호테〉의 첫부분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단편들 중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Rinconete y Cortadillo〉·〈질투심 많은 엑스트레메뇨 El celoso extremeño〉는 프란치스코 포라스 데 라 카마라가 잡다한 글들을 엮은 미발표 선집에 실리게 되었다.
1604년 7월(또는 8월)에 세르반테스는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프란치스코 데 로블레스에게 〈라만차의 현명한 신사 돈 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의 저작권을 팔았다.
그가 받은 액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9월에 출판이 허가되었고, 1605년 1월에 발간되었다. 출판되기도 전에 책의 내용이 당시 세르반테스와 최악의 관계에 있던 로페 데 베가를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으리라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텍스트의 상당히 많은 오류들이 오랫동안 저자의 실수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많은 오류에 대한 책임이 마드리드에 있는 후안데라쿠에스타인쇄소의 식자공들에게 있음이 밝혀졌다.
〈돈 키호테〉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599년에 나온 마테오 알레만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 Guzmán de Alfarache〉 제1부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1605년 8월 이전에 마드리드에서 2판, 리스본에서 2판, 발렌시아에서 1판을 찍었고, 뒤이어 1607년에 브뤼셀, 1608년에 마드리드, 1610년에는 밀라노, 1611년에는 다시 브뤼셀에서 판을 거듭했다.
〈라만차의 현명한 기사 돈 키호테의 제2부 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v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는 1615년에 나왔으며, 1612년에는 토머스 셸턴이 번역한 제1부의 영역판이 나왔다. 세르반테스의 이름은 곧 스페인뿐 아니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저작권을 팔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쓴 소설의 제1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재정적 이익을 누릴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후원자와 관련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했다. 책을 젊은 공작 베야르에게 헌정한 것은 실수였으나,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던 레모스 남작과 톨레도의 대주교 산도발 이 로야스와는 좀더 나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레모스 남작에게 제2부와 3편의 작품을 헌정했다. 그리하여 재정적 형편이 다소 나아졌으나 세르반테스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국민적 작가로서 인정받기를 갈망했으며, 로페 데 베가나 시인 루이스 데 공고라 이 아르고테에 견줄 만한 명성을 원했다.
자신의 변변하지 못한 위치에 대한 의식은 〈파르나소로의 여행 Viage del Parnaso〉(1614) 또는 이후의 2~3편의 서문들, 그리고 몇 가지 외적 자료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야심과 소설 형식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실험 의욕은 남은 생애가 12년도 채 남지 않은 57세의 세르반테스로 하여금 가장 왕성한 창작기를 맞이하게 했다.
한편 가정생활도 여의치 못했다.
1605년 6월 바야돌리드에 있는 집앞 길에서 칼부림이 일어나 어처구니없게도 온 가족이 체포되었다. 뒤에 그들이 마드리드로 궁정을 따라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돈문제로 분쟁에 휘말렸으며, 이사벨의 시끄러운 결혼문제까지 겹쳐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다. 가족은 그뒤 여러 해 동안 여러 동네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카예데레온에 정착했다. 당시의 많은 작가들처럼 세르반테스도 1610년 나폴리 총독이 된 레모스 남작의 비서직을 얻고자 했으나 실망만 안게 되었다. 1609년에 당시 유행하던 종교단체인 '지복성사의 노예'(Slaves of the Most Blessed Sacrament)에 가입했던 그는 4년 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재속 회원이 되었는데, 이는 보다 진지한 결단이었다.
또한 1612년에는 일종의 작가 단체인 아카데미아 셀바헤에 참여하는 등 문단 생활에 전보다 활발히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에 12편의 소설이 실린 〈모범 소설집〉이 발표되었다. 그 서문에 유일하게 알려진 작가의 자화상이 실려 있다. "독수리 같은 생김새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 부드럽고 훤한 이마, 명랑한 눈매, 균형이 잘 잡힌 매부리코, 20년 전까지만 해도 금발이었으나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 커다란 콧수염, 작은 입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빨들, 이빨은 이제 6개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건강하지도 않고 아래윗니가 제대로 맞지도 않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키에 피부색은 흰 편이다. 어깨는 다소 묵직하고, 걸음걸이는 그다지 가볍지 않다." 이 서문에 밝힌 대로 세르반테스가 카스티야 방언으로 최초로 독창적인 노벨라(이탈리아풍 단편소설)를 썼다고 한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나 각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불확실하다.
선집에는 약간의 다양성이 있어, 크게 로맨스에 기초한 이야기들과 사실적인 이야기들로 구분된다. 악한소설과 비슷한 노벨라 〈개들의 대화 El coloquio de los perros〉와 그 틀이 되는 이야기인 〈사기 결혼 El casamiento engañoso〉은 아마도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작품들일 것이다. 17세기에는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더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매브는 이런 이야기만을 면밀히 선별하여 1640년에 영역판을 냈다.
19~20세기에는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선호했으나, 다른 이야기들도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1614년에 세르반테스는 〈파르나소로의 여행〉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신화를 모방하여 풍자적 어조로 쓴 긴 알레고리 시로, 산문으로 된 후기가 덧붙어 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칭송하는 한편 몇몇 시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작가는 시를 쓴다는 것이 자신에게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시야말로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순수예술이라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자신의 희곡 중 단 1편도 상연되지 않으리라 낙심한 그는 1615년 그중 8편을 골라 8편의 희극적인 막간극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희극들은 창의성과 독창성이 부족하지는 않으나, 연극이라는 매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막간극들은 걸작으로 간주된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 제2부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614년 7월말 이전에 절반 이상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9월경에 날조된 제2부가 타라고나에서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라는 신원불명의 아라곤인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장점도 있으나 원전에 비하면 조잡한 것이었다. 로페 데 베가의 찬미자였던 이 작가는 서문에서 세르반테스에게 근거 없는 모욕을 퍼부었는데, 세르반테스는 당연히 반격하여 응수했다. 하지만 당대의 어떤 문학적 경쟁자들 사이에 오간 욕설에 비하면 그의 반격은 비교적 절제된 것이었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소설 제59장 이하에서도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와 '가짜' 돈 키호테 및 산초에 대한 비판을 싣고 있다. 〈돈 키호테〉 제2부는 1615년말 제1부를 펴냈던 같은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그것은 1616년 브뤼셀과 발렌시아에서, 1617년 리스본에서 재인쇄되었고, 161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처음으로 제1·2부가 합본되었다.
제2부의 프랑스어 번역판은 1618년에, 영역판은 1620년 이전에 나왔다. 제2부는 제1부에 잠재된 가능성을 작가의 목적에 맞게 이끌어내어 친숙해진 테두리 안에서 내용을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부가 제1부보다 더 풍부하고 심오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말년의 세르반테스는 여러 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그것들은 실제로 씌어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발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로는 〈베르나르도 Bernardo〉(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정원에서의 주일들 Semanas del jardín〉(〈데카메론 Decameron〉 형식의 이야기집)·〈라갈라테아〉 속편 등이 있다. 실제로 출판된 작품은 마지막 로맨스인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사역:북방의 이야기 Los trabaios de Persiles y Sigismunda, historia setentrional〉(1617, 사후 출판)뿐이다.
거기에서 세르반테스는 사랑과 모험을 내용으로 하는 영웅 로맨스를 헬리오도로스(230경~240 활동)의 〈아이티오피카〉풍으로 개작하려 했는데, 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될 지적으로 탁월한 장르였다. 교훈과 오락을 동시에 제공하려는 의도를 지닌 〈페르실레스〉는 로맨스가 지닌 신화적·상징적 잠재력을 활용한 야심적인 작품으로 발표되자 큰 성공을 거두어 2년 만에 스페인어로 8판이 나왔고, 1618, 1619년에는 각기 프랑스어 번역판과 영역판이 나왔다.
죽기 3일 전에 쓴 헌정사에서, 세르반테스는 '이미 한 발을 말 등자에 올려놓고서' 감동적인 어조로 세상에 하직을 고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최후의 평정한 상태에 도달했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처럼 1616년 4월 23일이 아니라 4월 22일에 사망했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며, 매장 확인서에 따르면 바로 다음날 '카예데칸타라나스'(지금의 카예데로페데베가)에 있는 맨발의 삼위일체회(Discalced Trinitarians)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남긴 유언장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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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르반테스의 작가시절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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