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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창의진

다른 표기 언어 山南倡義陣

요약 1906년 3월 의병장 정용기(鄭鏞基) 등이 경상북도 영천을 중심으로 조직한 항일의병부대.

산남의진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측근에서 시종관으로 있던 영천 출신 정환직(鄭煥直)은 고종의 밀령을 받아 대규모의 의병봉기를 계획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허위(許蔿)의 주선으로 중국인 왕심정(王心正)을 상하이로 보내 신식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아들 정용기에게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모아 항전하게 한 후 자기는 서울에서 별도의 계획을 추진하여 강릉에서 합류해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06년 3월 정용기·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이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권세가(勸世歌)·통유문·격려문을 지어 인근 지역에 소모장을 파견하자, 청송의 임용상(林龍相) 등 수많은 의병들이 모였다. 의병진영이 확대됨에 따라 1906년 3월 남쪽으로는 밀양과 울산, 북쪽으로는 상주·지례·김천에 이르기까지 총 24개 고을에 71명의 의병장을 배치하고 부서를 확정하는 산남창의진(山南은 '嶺南'이라는 뜻)을 구성했다.

당시 의병진용은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등이었다. 정용기가 4월 관군에게 체포되자 중군장 이한구가 대신하여 지휘를 맡았으나, 곳곳에서 패전하자 7월 하순에 일단 의진을 해산했다. 이해 9월 9일 석방된 정용기는 다시 의병조직에 착수하여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재건했다. 재건된 산남의진은 청하·자양·신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우재룡(禹在龍)의 지휘하에 있던 해산군인들과 합류했다.

이로써 기세가 높아진 산남의진은 강릉으로 북상하기 위해 영일로 진군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정용기·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 지휘부를 포함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새로 의병대장으로 선임된 정환직은 이세기·유재룡 등과 더불어 진영을 수습하여, 청송 보현산과 영일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주변의 일본군을 격파하는 데 진력했다. 이 때 13도 연합의병이 서울 진격을 계획하자, 산남의진은 부대를 해산하여 관동에서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환직이 일본군에게 피살되자 관동집결도 무산되었다. 이후 이세기 등이 남은 의병을 모아 주로 대구·영천 등지에서 항전을 했으나, 사실상 산남의진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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