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정환직

다른 표기 언어 鄭煥直 동의어 좌겸, 左兼, 백온, 伯溫, 우석, 愚石, 열남, 洌南, 동엄, 東嚴
요약 테이블
출생 1844(헌종 10), 경북 영천
사망 1907. 12. 20
국적 한말, 한국
좌겸(左兼), 백온(伯溫)
우석(愚石), 열남(洌南), 동엄(東嚴)
자녀 정용기

요약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치우(致右). 자는 백온, 호는 동엄(東嚴). 아들이 의병장 용기(鏞基)이다. 가세가 기울게 된 잔반(殘班) 집안에서 태어나 침술을 배워 의원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1887년(고종 24) 서울의 북부도사(北部都事)로 벼슬길에 나가 이듬해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이 되어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로 황해도에 가서 광부들을 거느리고 구월산 일대에 집결한 동학군을 진압했다.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병의뢰반대소 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통박했다. 1897년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가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사 겸 토포사로 나가 치안을 확립했으며, 이어 시종관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종묘(宗廟)에 불이 나자 고종을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1900년 도찰사가 되어 부패한 경주부윤을 파면했다가 모함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풀려난 뒤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자신은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하기로 하고 아들 용기를 영천으로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서울에서 내외 정세를 살피면서 전국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병과 무기를 모아 의병부대에 내려보내고, 격문을 붙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600여 명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그해 4월 28일 정용기가 청하를 공격하러 가다가 관군에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자 백방으로 주선하여 9월 풀려나게 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강릉을 거쳐 서울로 입성하도록 지시했다. 정용기가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재건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강릉으로의 북상을 준비하다가 영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자, 귀향하여 산남의진의 대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다시 일으켰다. 그는 청송 보현산(普賢山)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의병을 소모하고, 이어 영일의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근거지를 옮겨 무비와 군량을 갖추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뒤 대구·경주·영천을 중심으로 영덕·흥해·청송·의흥·신녕 등지를 오가며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무기와 탄약이 떨어져가자 휘하 의병들을 나누어 관동으로 집결하도록 했다. 북상하던 도중 청하 각전(角田)에서 병을 치료하다 영천 일본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12월 11일 붙잡혀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환직 필적

1843(헌종 9)∼1907. 조선 말기의 의병장.

정환직 묘

경북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정환직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