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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글리

다른 표기 언어 (Achille-Charles-Léonce-)Victor, 3e duc de Brog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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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85. 11. 28, 파리
사망 1870. 1. 2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외교관.

1835~36년 총리를 지냈으며 평생 반동세력에 맞서 싸웠다. 1809년 참관인 자격으로 제국 국무원에 발을 디딘 그는 나폴레옹에게 외교임무를 부여받고 여러 나라의 대사관원으로 파견되었다. 1814년 6월 제1차 왕정복고 체제에서 루이 18세 때 귀족원(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백일천하 이후 그는 귀족원에서 용감하게 네(Ney) 원수를 변호해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전체 귀족의원들 가운데 오직 브로글리 혼자만이 네 원수의 무죄를 주장하고 표를 던졌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때 정계에서 브로글리는 정론파(Doctrinaires)와 입장을 같이했다. 이들은 작지만 활동적인 정파로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으며 루이 18세 재위 때 채택된 자유주의적 언론법의 초안을 마련했다. 1826년 브로글리는 자식들 사이의 균등한 재산분배를 막기 위해 제정된 장자상속법을 공격했다.

1830년 7월혁명 이후 브로글리 공작은 수개월간 교육장관을 지냈고 이후 외무장관 직책을 맡았다. 그는 주로 프랑스와 영국의 친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1834년 4월 직책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3월 총리가 되어 선동활동을 금지하는 강력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1836년 2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그는 1847년 5월 런던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1848년에야 정계에 복귀했다. 1848년 혁명은 브로글리 공작에게 커다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가 보기에 혁명은 의회주의 원칙의 파기를 의미했다.

1849년 5월 '뷔르그라브'라고 알려진 보수정파의 일원으로서 외르 주 대의원에 선출된 그는 사회주의의 물결을 저지하는 한편 독재정치를 지지하는 반동의 득세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1851년 12월 3일 쿠데타 이후 그는 나폴레옹 3세 체제의 가장 격렬한 적대자가 되었다. 1855년부터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어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을 주로 철학과 문학을 탐구하는 데 바쳤다.

그의 저서로는 〈프랑스 정부론 Vues sur le gouvernement de la France〉(1861)·〈수필 및 강연 Écrits et discours〉(3권, 1863)·〈자유무역과 과세 Le Libre Échange et l'impôt〉(1879)·〈회상록 Souvenirs〉(4권, 1885~8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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