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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9. 1. 10, 프랑스 사를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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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15. 12. 7,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후 복고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오자 다시 그의 편에 서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옛 근위대를 지휘해 워털루 전투에 참가했으나 다시 들어선 왕정 때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이 네에게 고위 공직자의 딸이자 자신의 시녀인 아글라에 오기에를 아내로 맞게 하면서 네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다. 네는 영향력있는 처가 덕분에 33세의 나이로 통령정부에 들어가 사교계와 군부의 일원이 되었다. 네는 1806년 예나에서 프로이센군을, 1807년에는 아일라우와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이후 나폴레옹의 측근이었으나 네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 야심이나 편향은 전혀 없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위엄을 보인 그의 모습은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변신했던 일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했고, 서사시와 같았던 그 시대에서 그를 가장 영웅적인 인물로 새겨지도록 했다.
개요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후 복고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오자 다시 그의 편에 서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옛 근위대를 지휘해 워털루 전투에 참가했으나 다시 들어선 왕정 때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군사경력
그의 아버지는 술통 제조업자이자 대장장이였다.
지방 변호사 밑에서 일하다가 1788년 도망쳐 경기병(輕騎兵) 연대에 들어갔고 혁명전쟁이 터지자 기회를 얻었다. 1792년 발미와 제마프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부터 1800년 제1공화국이 마지막으로 치른 호엔린덴 전투에 이르기까지 혁명전쟁에 두루 참가했다(프랑스 혁명전쟁). 네는 초기 전투에서 그의 성격상 상반되는 두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전투에서의 뛰어난 용맹성과 진급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었다. 그는 몸소 시범을 보임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려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꺼이 전투에 몸을 내던지면서도 높은 계급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승진되었을 경우에는 상관이나 정부의 상급관리들에게 항의했지만 이것은 모두 기각되었고, 결국 호엔린덴 전투 때는 라인 강변에 주둔한 빅토르 모로 군대의 사단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까지 네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적이 없었는데 1801년 5월 튈르리 궁으로 와서 제1통령(統領)을 만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궁정의식과 화려한 생활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라인 주둔군은 이미 해체되었고 네는 로렌 지방에 그리 크지 않은 농장을 사놓았다. 나폴레옹을 공식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특별한 일은 없었다. 제1통령 나폴레옹은 모로 장군을 군인으로서는 경쟁상대로, 정치적으로는 적으로 생각하여 모로의 측근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제핀이 네에게 고위 공직자의 딸이자 자신의 시녀인 아글라에 오기에를 아내로 맞게 하면서 네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다.
이들은 베르사유 근처에 있는 오기에 가문의 성(城)에 있는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네는 영향력있는 처가 덕분에 33세의 나이로 통령정부에 들어가 사교계와 군부의 일원이 되었다.
영국과의 평화가 깨지면서 나폴레옹은 영국 해협 연안에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네는 이곳에 배치되기를 요청해 제6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1804년초 경찰은 망명한 왕당파들이 나폴레옹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여 부르봉 왕정복고를 꾀하려는 음모를 밝혀냈다. 네의 친구이자 공화주의자인 모로 장군 관련설이 나왔고 모로와 공모자들은 공개재판에 넘겨졌다.
나폴레옹은 2년형을 선고받은 모로를 국외추방으로 감형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의 세습황제에 오른 다음날인 1804년 5월 19일 옛 군대계급인 '원수직'을 부활시켜 네를 비롯한 14명 장군의 원수 진급을 공표했다. 러시아·오스트리아·영국이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3차 유럽 동맹을 구성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재빨리 유럽 대륙 중심부로 진군했다. 네는 1805년 10월 엘힝겐에서 프랑스군에게 첫번째 승리를 안겨주었고, 이 공으로 1808년 엘힝겐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두 달도 안되어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찔렀다.
네는 1806년 예나에서 프로이센군을, 1807년에는 아일라우와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1808년 스페인 출병 때도 용감한 사람이라는 그의 명성은 변함이 없었으나, 전술을 구상할 때 참모들과 협조하기 힘든 성미 급하고 까다로운 사령관이라는 평도 받았다.
나폴레옹이 직접 내리지 않은 명령에는 거의 불복종으로 여겨질 만큼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작전을 멀리서 지휘했기 때문에 네는 모든 상사와 언쟁을 벌였으며, 1811년초 불명예스럽게도 프랑스로 소환되었으나 1812년의 러시아 작전 때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승패를 가리지 못한 보로디노 전투를 끝낸 다음날 아침, 나폴레옹은 그에게 모스크바 대공의 작위를 내렸다. 모스크바 후퇴 때 네는 후위(後衛) 부대를 지휘했으므로 러시아 포병대의 포화와 수많은 카자크 부대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기적으로 보일 만큼 비상한 용기와 재치, 그리고 뛰어난 임기응변의 재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대가 몇 주일이나 보이지 않아 전멸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네가 추위에 얼어붙고 움츠러든 대군의 주력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나타나자 그를 가리켜 '용자(勇者) 중의 용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1813년 유럽의 여러 전투에서 네는 옛 친구들과 싸워야 했다.
모로는 망명생활을 했던 미국에서 돌아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사고문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드레스덴 외곽에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편 네는 덴네비츠에서 스웨덴의 왕세자인 카를 14세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카를은 왕세자가 되기 전 '장 베르나도트'라는 이름으로 네처럼 혁명군 하사관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네는 부상을 당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패배한 프랑스군도 독일을 거쳐 어렵게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평화를 바라는 호소를 못 들은 체하고 새로운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프랑스 동부에서 지휘를 맡은 네는 혁명전쟁 때 배운 유격전을 활용했다.
정치적인 변신
나폴레옹은 나머지 군대를 모두 퐁텐블로에 모아 파리에서 유럽 동맹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네는 자신을 포함한 장군들의 견해를 대변해 나폴레옹에게 군대는 더이상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믿었지만 '용자 중의 용자'라는 말대로 군대는 장군들의 명령에 따를 태세였으므로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네는 옛 지위와 칭호를 그대로 누리면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서약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에 나타나자 브장송 지역의 지휘를 맡고 있던 네는 국왕에게 "그 사람을 철창살 우리에 가두어 파리로 끌고 와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사지역 주민들이 부르봉 왕가에 대단히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안 그는 나폴레옹의 전갈을 받은 뒤 나폴레옹 지지를 선언했고 이 말에 그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열광했다. 국왕은 파리에서 도망쳤고 나폴레옹은 튈르리 궁으로 다시 들어갔다. 네는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집에서 불만스럽게 보냈다. 그는 나폴레옹을 만나지 못하다가 워털루 전투 3일 전에 불려가 전투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에 맞서 오른쪽 진영을 지휘해 리니에서 이들을 무찔렀고, 네는 왼쪽 진영의 지휘를 맡아 카트르브라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보여준 태도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날이 저물자 프랑스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네는 포연에 그을린 얼굴로 부러진 칼을 손에 들고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제 그들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목매달아 죽일 것이다." 이것은 앞날을 정확히 내다본 말이었다.
재판과 죽음
부르봉 왕가가 다시 복귀하자 네는 마지못해 프랑스에서 도망쳤으나 프랑스 남서부의 외딴 곳에서 체포당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자 그는 이 법정의 권한을 인정할 수 없고 귀족으로서 상급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재판이었으며, 예상대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병사들에게 언제나 불사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그는 1815년 12월 뤽상부르 정원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쳤다.
네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 야심이나 편향은 전혀 없었다.
군인으로서 처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참가한 프랑스의 자연지리적 국경(라인 강, 피레네, 알프스)을 확정짓는 전투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으나 유럽을 지배하려는 나폴레옹의 주도면밀한 전략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능력을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위엄을 보인 그의 모습은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변신했던 일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했고, 서사시와 같았던 그 시대에서 그를 가장 영웅적인 인물로 새겨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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