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나폴레옹 1세의 백일천하

다른 표기 언어
나폴레옹 백일천하

ⓒ William Sadler/wikipedia | Public Domain

퇴위한 45세의 나폴레옹은 그냥 뒤로 물러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았다. 1814년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황제에게 넌더리가 나 있었지만 부르봉 가문의 복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거둔 성과에 강한 애착을 가졌고 돌아온 루이 18세와 망명귀족들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쫓겨났던 사람들의 저항과 음모가 되살아났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이 그를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빈 회의). 또 오스트리아가 아내와 아들이 그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하지만 그의 아내는 애인이 있어 남편과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칸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정신의 화신으로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100일 천하).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코뱅파와 동맹을 맺어야 했으나 1793년과 1794년처럼 사회주의적인 실험이 되풀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믿은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와 거의 똑같은 정치체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열정이 썰물처럼 급속히 사라졌고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했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 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7월 3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왕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나폴레옹 1세의 백일천하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