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49. 5. 3, 독일 알토나 근처 클라인플로트베크 |
---|---|
사망 | 1929. 10. 28, 로마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 제국의 총리, 프로이센 총리(1900. 10. 17~1909. 7. 14 재임).
황제 빌헬름 2세와 손잡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독일 확장정책을 폈다.
비스마르크 내각 독일 제국 외무장관의 아들로 태어나 로잔(스위스)과 베를린,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874년 독일 외무부에 들어갔다. 몇 차례 외교직을 거친 뒤 1893년 로마 주재 독일 대사가 되었다. 1897년 6월 빌헬름 2세에게 외무장관으로 임명받으면서 그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독일 제국 총리 호엔로에 실링스퓌르스트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3년 뒤에는 제국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성급한 황제가 어리석은 짓을 범하지 않도록 막으면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주장하는 여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
프로이센 총리 겸 제국의 총리로서 그가 선택한 대외정책은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세계 열강들 틈에서 독일 제국에 '유리한' 정책을 펴야 한다는 빌헬름 2세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Realpolitik)를 나름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한편 프로이센 총리로서 그는 중국의 자오저우 만[膠州灣] 캐롤라인 제도, 사모아 섬을 점령했다(1897~1900). 또한 중동지역에서 독일의 위치를 다져줄 바그다드 철도건설을 적극 추진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1908)을 승인하도록 유럽 여러 나라를 설득했는데 이 합병은 독일 제국의 고립화를 두려워한 국민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영국·프랑스·러시아의 대(對)독일 연합구성을 저지하는 것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8, 1901년 그와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보장하라는 조건을 달고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독일이 해상주도권을 위협할까봐 우려한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1905년 러시아와 비외르쾨 조약을 맺었지만 러시아는 이에 상관 없이 영국-프랑스 협약(1907)을 지지했다. 더욱이 모로코 사건(1905~06)을 둘러싸고 영국·프랑스가 맺은 이 협약은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보수당과 가톨릭 중앙당, 때때로 국민자유당의 지지에 의존했다.
그는 사회민주당을 탄압하지 않았고 국무장관 아르투르 포자도프스키를 통해 몇 가지 조심스런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기까지 했지만 사회민주당이 실질적인 권력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몇몇 긴급한 문제들,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법 폐지,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이중성 해소, 황실 재정의 급진적 개혁, 직접세의 부과 등은 해결을 회피했다. 제국의회와 협력할 필요를 느낀 1905년부터 그는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로 기울었다.
1908년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The Daily Telegraph〉지에 빌헬름 2세의 경솔한 발언이 실려 문제가 되자 뷜로는 이듬해 사임했다. 그는 신문이 발간되기 전에 보냈다는 기사의 교정쇄를 읽어보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빌헬름은 뷜로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그 기사를 허락했다고 믿었다. 그가 죽은 뒤 출판된 〈회고록 Denkwürdigkeiten〉(4권, 1930~31 프란츠 폰 스토카메른 편집)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면하려 애쓴 흔적이 나타나 있지만 사실 정치가로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