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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원주민은 오늘날 부룬디 전체 인구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한 트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찍부터 사냥과 도기제작을 업으로 삼은 소인족이다. 부룬디 최대의 종족은 후투족인데, 그들의 부룬디 이주는 수백 년이 걸렸으며 아마 11세기에 이르러서야 완료되었을 것이다.
그후 약 300∼400년 뒤에 투치족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전체 인구의 15%를 넘은 적이 없으면서도 교묘한 가축 및 토지계약을 통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후투족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제도는 왕(mwami)과 제후(ganwa) 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제후는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후투족과 트와족은 열등 계급이 되었다.
1675∼1705년 은타레 루샤치 왕은 자신의 지배권을 중앙의 은코마 지역으로부터 인접한 부투치·킬리미로·부옌지 지역으로 확장했다. 루샤치 다음에 즉위한 루감바 은타레 2세(1795경∼1852)는 정복사업에 더욱 열을 올려 지금의 르완다 남부와 탄자니아 서부 일대를 차지하기도 했다. 왕국의 체제는 지방분권화되었고, 그 결과 지방의 제후들은 반자치권을 행사했으며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싸움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런 현상들은 19세기말에 더욱 심각해져, 1900년에 이르러서는 은타레 루감바의 후계자 므웨지 키사보가 왕국의 절반밖에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 선교사업은 1879년에 시작되었다. 1885년 베를린 회의는 부룬디를 독일의 영향권에 두었으나, 실제로 독일인이 부룬디에 처음 이주해온 것은 1906년이었다. 1916년에 벨기에가 부룬디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고, 1923년 국제연맹은 부룬디와 르완다에 대한 통치권을 벨기에에 위임했다.
당시에는 부룬디와 르완다를 합쳐 루안다-우룬디(Ruanda-Urundi)라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위임통치가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로 바뀌었고, 식민지시대의 제반 여건은 종족간의 적대관계를 심화시켰으며, 독립이 가까워졌을 때는 종족간의 적대행위가 부룬디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1962년 투치족이 지배하는 왕국 형태로 독립을 쟁취한 부룬디는 1965년에 후투족의 반란이 있었다. 이 반란은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1년 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정부 및 군부에서는 후투족에 대한 숙청작업이 더 한층 강화되었다. 1970∼71년에는 일부의 투치족도 숙청되었으며 그후 내란이 발생, 25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이 사망하고 10만 명이 집을 잃은 난민이 되었다. 1976년에 또다른 쿠데타가 발생해 최고혁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부룬디는 1당제 국가가 되었다. 1977년 쿠데타 세력들은 장 바티스트 바가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이와 함께 새 정권은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81년에 부룬디의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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