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575, 독일 작센 괴를리츠 근처 알트자이덴베르크 |
---|---|
사망 | 1624. 11. 21, 괴를리츠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철학적 신비주의가.
개요
관념론과 낭만주의 등 그뒤의 지적 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신비 The Great Mystery〉(1623)는 르네상스의 자연 신비주의와 성서 교리를 종합한 저서이다. 같은 해에 쓴 〈은총의 선택에 대하여 On the Election of Grace〉는 칼뱅주의가 퍼지면서 당시 날카롭게 떠오른 자유문제를 다루고 있다.
초기생애
뵈메는 종교개혁 말기에 태어났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1594년 (또는 1595) 종교개혁에 관한 갖가지 논쟁이 격렬하던 인근 도시 괴를리츠로 갔다. 이곳에는 겉으로는 루터파이지만 사실은 칼뱅주의를 지지하는 칼뱅파 비밀교도, 급진 프로테스탄트교도인 재세례파 교도, 종교개혁자 슈벵크펠트를 따르는 슈벵크펠트파 교도, 신비주의 의사 파라켈수스를 따르는 파라켈수스파 의사, 인문주의자 등이 정통 루터파 교도와 싸우고 있었다. 당시 괴를리츠의 루터파 목사 마르틴 묄러는 자신이 세운 여러 비밀교회당에서 많은 사람을 '일깨우고' 있었는데, 이 종교집회에서는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와 독일 중세가 관련된 전통 문헌을 공부했다.
1600년 묄러에게 감화받은 뒤라고 짐작되지만 갓 결혼한데다가 구둣방을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뵈메는 15분에 걸쳐 신비한 종교체험을 했다.
이때 얻은 경험적·사변적 직관은 당대의 문제와 혼란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했다. 우주질서를 설명하는 데서 생겨난 중세 우주론과 르네상스 우주론의 갈등, 시대를 불문하고 제기되는 악의 문제, 중세 위계질서의 붕괴, 당시의 신정분리(神政分離) 등은 그가 말했듯이 "그렇다와 아니다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변증법 원리의 재발견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 원리는 루터의 〈소(小)교리문답〉에 나오는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한다"라는 구절에 비추어볼 때 기본적으로 루터파의 원리였지만, 뵈메는 이 원리를 경험적·자연적 실재를 광범하게 양극화하는 '실재변증법'(Realdialektik)으로 만들었다.
저술
뵈메는 여러 해 동안 싹튼 직관을 바탕으로 처음에는 혼자 사용할 목적으로 자기 사상을 논문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The Aurora〉(1612)라는 제목이 붙은 이 수고는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다. 스스로 '아기 걸음마'라고 부른 이 수고는 오직 신을 경배하기 위한 일념으로 신학·철학·점성학 등을 한데 섞어놓은 글이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 회람되던 〈오로라〉의 복사본 하나가 묄러의 목사직을 계승한 그레고리 리히터의 손에 들어가자 리히터는 구두장이가 신학자를 사칭한다고 비난했다.
리히터는 이 문제를 괴를리츠 지방종교회의에 회부했는데 뵈메에게 글을 더이상 쓰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침묵하는 기간 동안 그의 사상은 더욱 원숙해졌으며 구둣방 일도 더욱 번창해졌다. 그는 '대가들'의 글도 읽었지만, 책을 쓰는 유식한 구두수선공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고 있던 이웃과 친구가 빌려준 무명의 책들도 탐독했다. 친구 중에는 의사나 귀족도 있었는데 이들 덕택에 사변적 연금술, 특히 그당시 유명했던 스위스의 의사 파라켈수스(1490경~1541)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파라켈수스의 연금술과 신비주의 견해를 통해 그는 더욱 자연 신비주의(nature mysticism)에 빠져들었으며 이때 습득한 용어법은 그의 다음 시기에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연구실에서 직접 실험한 적은 없지만 자연 신비주의 이론과 개인 체험을 다 같이 연금술의 용어로 묘사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려 했다. 이 시기에 6편 이상의 논문을 썼는데, 이 글이 친구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읽히는 동안 그는 어느덧 영향력 있고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 2번째 저술활동이 일어난 해는 '30년전쟁'(1618~48)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619년이었다. 실제로 라인팔츠의 겨울왕 프리드리히 5세가 프라하에 입성했을 때 뵈메는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귀에 거슬리는 여러 논쟁이 난무하는 가운데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칼뱅주의(개혁종교의 견해), 천년왕국설(세계의 종말이 온 뒤 하느님의 백성이 1,000년 동안 세계를 다스린다는 설), 과격한 분리주의라는 비난이 그에게 가해졌고, 이때문에 한동안 자신이 정통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변호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다시 다듬으면서 독일 신비주의의 전통 주제인 참회·복종·갱생 등에 관한 일련의 신앙심 깊은 논문들을 썼다. 1622년 그의 친구들은 이 논문들 중 여러 편을 묶어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괴를리츠에서 출판했다. 자연 신비주의에 신앙적 열정이 가미된 이 소책자가 출판되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리히터는 대중 앞에서 뵈메를 비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만년에 접어든 뵈메는 1623년 2권의 주저 〈위대한 신비〉와 〈은총의 선택에 대하여〉를 썼다.
앞의 책은 〈창세기〉에 나오는 우주창조의 과정을 소금·유황·수은 등 신비한 원소를 포함한 파라켈수스의 3원리에 의거하여 설명함으로써 르네상스 자연 신비주의와 성서 교리를 결합했다. 뒤의 책은 철학적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서, 당시 칼뱅의 예정설(인간의 운명을 하느님이 미리 알고 있다는 설)이 날카롭게 만들고 있던 자유문제를 변증법적 직관에 의거해 설명했다.
이 주제는 훗날 관념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과 독일 신학자 프리드리히 폰 바더가 이어받았는데, 바더가 쓴 〈은총의 선택에 대하여〉에 대한 주석서는 지금도 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