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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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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65(명종 20)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전기의 승려.
호는 허응·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백담사에 거주하다가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당시 극심한 탄압 속에서 소멸해가던 불교를 중흥시켰다.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에 출가해 참선과 경학연구에 물두하다가 6년 뒤 하산했다. 그러나 1538년(중종 33)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찰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4년 뒤 하산해 정만종(鄭萬鍾) 등 유학자들과 사귀었다. 함흥 백운산 국계암에서 3년을 머무른 뒤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병을 얻어 경기도 천보산 회암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 주지로 부임했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그는 유생들의 반대 상소 속에서도 불교융성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전기에 선종(禪宗)·교종 양종(兩宗)으로 강제 통합되어 세력이 줄어든 데 이어 그 양종의 존재마저 희미해진 당시에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에 교종을 두게 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단을 부활하는 데 전념했고 종단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판선종사와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갔다. 1559년(명종 14) 다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은 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참형당했다.
사상
보우는 '일정론' 속에서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한 뒤,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면서 융합론을 주장했다. '일'은 우주적 원리이며, '정'은 도덕적 원리라고 하고, '일즉정 정즉일'이라 했다.
즉 일정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가지고 불교의 일심과 유교의 중을 합일시키려 했다.
그는 불교의 일은 일심이며, 정은 심의 순수함이요, 유교에서의 일은 일기며, 성실이요, 중으로 보았다. 또한 공자가 말한 상(5상)이나 불교의 권(방편교)은 손등이나 손바닥과 같이 서로 상통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사상은 화엄의 무애사상을 바탕으로 해 자구책을 모색하던 당시 조선 불교의 사상적 경향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으로 절충주의적 융화론의 특색을 띠고 있다. 저서로는 〈허응당집〉·〈나암잡저〉·〈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권념요록 勸念要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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