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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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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호플리테스(hoplités)라고 하는 중장보병(重裝步兵)이 군대의 중심이었다.

중장보병은 2m 이상의 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방패·투구·흉패·정강이받이로 몸을 보호하며, 보통 가로·세로 8명씩 모두 64명으로 편성된 방진(phalanx)이라고 하는 밀집대형을 이루었다. 로마의 군단도 하스타티(hastati)라고 부르는 중장보병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기마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보병 중심의 고대 국가 군대에서도 기병의 역할이 커졌고, 4세기경부터 약 1,000년간 유럽에서는 기병이 육군의 중심이 되었다. 등자와 제철(蹄鐵)의 발명이 기병의 전투능력을 더욱 향상시켰다. 보병이 다시 육군의 주력이 된 것은 14세기경부터였는데, 그것은 보병이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장궁(長弓)·쇠뇌·화기 등의 무기를 발달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기병을 격파했다. 스위스 독립군의 민병(보병)이 모르가르덴 전투(1315)에서 오스트리아의 기병을 격파하고, 백년전쟁 중의 클레시 전투(1346)에서 영국 농민군의 장궁대(長弓隊)가 프랑스의 기병을 격파한 것은 기병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1424년경에 발명된 화승총(火繩銃)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1448년 프랑스는 자유사격대를 창설하여 백년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백년전쟁 기간에 병사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새로 생긴 보병에게는 기사와 달리 영토를 줄 필요가 없어 봉급으로 많은 보병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상비군(常備軍)이 정착되었다.

중국

중국 역사의 주요무대가 되었던 지역(지금의 중국 동북3성,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간쑤 성[甘肅省], 칭하이 성[靑海省],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吳爾] 자치구, 시짱[西藏] 자치구 등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말의 사육이 매우 어려워 옛날부터 중국 군대에서는 보병이 주력부대였다. 보병은 밀집장창(密集長槍), 즉 집단으로 긴 창 등을 무기로 하여 기동력에서는 떨어졌지만 돌진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한대(漢代)에 북방 흉노와의 전쟁에 있어서나, 당·송·명·청 등의 왕조가 변경에서 벌인 싸움은 모두 중국측의 보병과 이민족측의 기병과의 전투였다.

하루의 이동거리, 속도, 전투에서의 행동력 등 여러 면에서 기병이 뛰어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전마(戰馬)의 획득과 사육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그 성과는 높지 않았다. 한의 무제가 서역(西域)으로부터 들여온 한혈마(汗血馬)를 귀하게 여긴 것, 그리고 왕안석(王安石)의 보마법은 말의 재생산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명대에는 이민족이 원하는 차(茶)를 주고 대신에 말을 수입하는 차마무역(茶馬貿易)이 번창했는데, 이것 또한 중국에서의 말의 사육과 재생산이 어려웠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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