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599. 9. 25, 롬바르디아 공국 비소네 |
---|---|
사망 | 1667. 8. 2, 로마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의 건축가.
본명은 Francesco Castelli.
개요
바로크 건축양식의 창안자이다.
1627년경 이름을 보로미니로 바꾸었으며, 로마에 있는 산카를로알레콰트로폰타네 교회의 인상적인 디자인으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디자인의 기초를 인체의 균형보다는 오히려 기하학 모듈에 둔 점에서 잔 로렌초 베르니니나 그밖의 당대 건축가들과 구별된다.
청년기와 교육
조반니 도메니코 카스텔리와 아나스타시아 가로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석세공을 배우러 밀라노에 가서(1608/14) 건축가 길드에 들어갔다.
몇 년 동안 건축과 조각의 기능을 익힌 뒤 아버지가 돌려받아야 할 빚을 대신 받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1620년에 로마로 달아났다. 거기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일류 개업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친척인 카를로 마데르노의 사무실에서 제도공 겸 석공으로 일했다.
성미가 급하고 독신주의자였지만 그는 건축을 배우는 데는 대단히 열심이었다.
마데르노는 보로미니의 잠재적 재능을 곧 알아차렸다. 노장인 마데르노와 젊은 보로미니는 마데르노가 원래의 계획을 뜯어 고친 성베드로 대성당의 여러 부분을 함께 만들었다. 팔라초 바르베리니를 만들 때 마데르노는 기본 구상을 결정한 다음 보로미니에게 세부적인 일을 맡겼다. 두 사람의 재능이 결합하여 산안드레아델라발레 교회의 정면 디자인이 만들어졌으며, 보로미니에게는 그 교회의 둥근 지붕 위에 있는 랜턴이 맡겨졌다.
이 건축물에서는 마데르노의 양식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보로미니의 개성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16세기 후반의 산안나데이팔라프레니에리 교회의 정면은 보로미니의 독자적인 작품이었다. 5개의 베이로 이루어진 정면과 2개의 탑을 기존의 타원형 돔과 결합하려고 한 그의 구상은 공간을 균형있게 배치한 점에서 나중에 그가 만든 산아그네제인아고네 교회(나보나 광장 소재)와 매우 비슷했다.
마데르노가 구상한 산이그나치오 교회의 설계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수정했다. 그는 쌍기둥을 여러 개 사용함으로써 그의 양식의 주요한 특징인 공간의 분절화(分節化)를 꾀했다. 그의 구조물에서 공간은 단순히 빈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주위의 건축물에 둘러싸여 그 자체가 하나의 요소로서 나타난다.
나중에 그는 레마지 예배당에서처럼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탁 트인 구조로 바꿈으로써 이 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데르노는 팔라초 바르베리니의 건축이 시작된 지 3개월 후인 1629년 1월에 죽었다. 그후 유명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이 일을 맡았지만, 그의 재능은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 상태였다. 보로미니는 계속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마데르노의 설계를 구체화시켜 나갔으며 베르니니와의 협조도 잘 해나갔다.
그러나 후원자는 또다른 설계가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마데르노가 구상한 저택의 동쪽 정면 설계를 포기했다. 보로미니는 코르토나와 함께 일할 마음도 없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실망한 나머지 1631년 그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베르니니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의 닫집을 설계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했는데, 그것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올려놓기로 계획된 커다란 닫집으로, 옛부터 교황이 교회를 방문할 때면 교황 위에 받쳐지는 닫집 모양의 차양을 연상시킨다.
이 거대한 청동 닫집은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매우 긴밀한 협조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4개의 나선형 기둥 위에 있는 커다란 S자형의 소용돌이꼴 장식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 작품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모든 일을 지휘했던 베르니니는 보로미니의 공헌을 높이 평가해 1631~33년에 걸쳐 이 일의 대가로 보로미니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다.
독자적 활동
성베드로 대성당의 닫집은 1633년에 완성되었다.
그 바로 전 해에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추천으로 대학 건축가 직위를 받았다. 새로운 위치에 놓이게 되자 그는 독립건축가로서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독립 건축가로서 처음 맡은 일은 1638년에 시작한 로마의 산카를로알레콰트로폰타네 교회 및 그 수도원으로, 이것은 그때까지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건축물이었다. 이 교회는 내부의 크기가 성베드로 대성당의 기둥 하나보다도 작게 설계되어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그 풍문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보로미니는 별개의 건물에서나 가능할 만큼 각기 다른 요소들을 이 한 건물에서 결합시켰다. 즉 건물의 아랫부분은 세밀한 물결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중간부분은 전형적인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평면을 이루며 윗부분은 다소 새롭고 자주 쓰이지 않는 타원형 돔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옛것과 새것이 독창적으로 결합되어 복잡하게 뒤얽힌 리듬을 이루고 있다. 빈틈 없는 설계의 조명에서 나오는 뚜렷하고 환상적인 효과는 공간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돔은 빛이 들어오는 지점의 바로 아래쪽 부분에 가려져서 마치 환영처럼 실내 위에 떠있는 것 같이 보인다. 보로미니는 유명한 스파다가(家)와 친교를 갖기도 하고 10년 동안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후원자들과의 관계는 그의 완고하고 도발적인 태도로 인해 파란만장했으며 때때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몹시 가슴아파했지만, 돈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옷도 정장 차림은 거부했다. 고집이 세고 침울한 성격인 데다가 신경질적으로 화를 잘 내는 바람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한 번은 그의 건물 부지에서 어떤 사람이 건물의 일부에 흠을 내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그 사람을 마구 구타해서 죽게 만든 적도 있었다.
보로미니의 침울한 성격으로 볼 때 반대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베르니니와의 충돌이 갈수록 심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범한 이 두 예술가는 함께 일하는 동안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보로미니의 양식은 베르니니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활력으로 넘쳤으며, 베르니니는 건축의 세부를 처리하는 데서 보로미니의 새로운 방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보로미니는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베르니니의 손아래에 있었던 것이 마음에 몹시 사무쳐 그와 헤어지기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말년에 이렇게 생각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베르니니가 성베드로 대성당의 작업 도중 그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으며 그의 노고를 인정해서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끝마친 뒤에도 베르니니는 보상을 뒤로 미루어 결국에는 그럴 듯한 말과 화려한 약속에만 그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성격과 경력 및 삶에 대한 태도가 아마 대립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베르니니는 귀족들이나 권력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건축가로서뿐만 아니라 조각가와 화가로서도 크게 성공했으며, 외향적이고 매력적인데다가 재치도 있었다.
반면에 보로미니는 외롭고 내향적이며, 자신의 뛰어난 전문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그만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둘 사이의 충돌은 1645년에 이르러 마데르노가 설계한 성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을 철거하는 문제로 인해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마데르노는 그것들을 기초만 세워놓았는데, 1636년 베르니니가 그것들을 완성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1641년 탑 하나가 세워진 뒤 기술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더이상의 건축은 중단되었으며, 4년 뒤 위원회는 그것을 없애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때 보로미니는 베르니니를 통렬하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베르니니는 이에 대해 노골적인 반응은 거의 보이지 않다가 1665년 파리에 갔을 때 보로미니가 신인(神人) 동형론의 건축 원리를 무시했다고 비난했다(비례). 아담의 육체는 하느님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건축물의 균형은 남자와 여자의 신체 균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 베르니니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보로미니는 본질적으로 중세 양식의 기하학적 형태에 건축의 기초를 두었는데, 아마 이것은 대대로 중세의 건축 양식이 전해내려온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보로미니는 건물이나 방을 기하학적 형태로 만든 다음 이것을 기하학적인 하부단위로 나누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는 올바른 건축의 원리를 부정한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인동형론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자신의 건축에 인간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에게는 산필리포네리 교회의 오목한 정면이 마치 팔을 내밀어 사람들을 환영하는 몸짓으로 보였으며, 중앙 부분은 가슴을, 양쪽의 날개 부분은 팔과 팔뚝을 상징했다.
보로미니의 설계의 특성은 그가 신인동형론에서 벗어난 것 못지 않게 불안정했다.
그의 후원자들조차 그의 새로운 창작물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파격(破格)은 그당시 건축의 기본적인 표준 형태로 받아들여진 전통적인 고전양식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가 고전 세계를 열심히 연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고대 건축물의 유적들을 그린 드로잉을 보면 그가 로마 건축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산판크라치오에 있는 '빌라 팜필리'의 설계를 보면 문헌상으로 정확하게 고전시대의 건축사조를 되살린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 건축의 성과를 이용하여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퍼져 있었으며, 보로미니는 이러한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만 '모방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건축에 몰두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은 결코 앞서가지 못한다고 한 미켈란젤로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보로미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비롯해 고대의 건축 양식과 자연이 그의 출발점이었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고대의 틀에 박힌 전통적인 구성 양식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티볼리에 있는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볼 수 있듯이 기발하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고대의 건축 양식을 새롭게 해석했으며, 로마 시대의 건축 구조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한 모서리를 이용하여 둥근 천장을 받치고 벽돌로 건물을 쌓았다.
고대 건축에 대한 보로미니의 태도가 남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역사적으로 중세 문화를 타락한 것으로 거부한 시기에 서 있으면서 중세 건축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도 남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벽을 세우지 않는 경향이라든가, 둥근 천장을 보강하기 위해 늑재(肋材) 구조물을 사용한 것이라든가,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도와 장식을 사용한 것이라든가, 심지어 빛이 건축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까지 모두 중세의 건축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러나 당대의 건축에 더 충실했던 보로미니는 15세기의 피렌체파 건축과 16세기의 마니에리스모 건축에서, 특히 매우 중요한 건축을 통해 보로미니에게 더욱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보여준 미켈란젤로의 건축에서 일정한 형식상의 특성들을 발견했다.
미켈란젤로의 많은 건축 구도에서 공간이 팽창과 수축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은 보로미니에게 이러한 방법의 동적인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당대의 다른 건축가들에 비해 과거의 건축에 훨씬 익숙했던 보로미니는 그러한 요소들을 잘 적용했다.
보로미니는 구조와 재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통해 이렇게 다양한 양식들을 잘 소화해냈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롬바르디아의 예술 전통은 보로미니에게 구조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제공해주었다. 그 지식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교는 튼튼해졌으며, 이것은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는 성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을 위해 만든 정확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탑들과 나보나 광장에 있는 팔라초 팜필리의 원통형 볼트를 받치고 있는 금속 구조물, 정밀한 벽돌 구조로 되어 있는 산필리포네리 교회의 기도실, 산이보델라사피엔차 교회나 레마지 예배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독창적인 돔과 둥근 천장 등이 있다. 그는 건축현장을 일종의 확대된 제도판으로 여겼으며, 설계와 시공 사이의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현장에서 실험하며 즉석에서 고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했다.
예를 들면 산카를로알레콰트로폰타네 교회를 지을 때 보로미니가 현장에서 직접 석공들을 감독하지 않았다면, 예배당의 둥근 천장으로 통하는 3차원적인 곡선 모양의 아치를 비롯한 여러 독특한 요소들은 특징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설계도 가운데 하나를 보면 보로미니가 도시환경에 대한 감각도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도시계획). 그는 광장을 이용하여 산조반니인라테라노 교회의 정면에 동적인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다.
그는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리를 똑같은 정면을 가진 24개의 건물로 에워싸서 공간을 크고도 치밀하게 배치하고자 했다. 언제나 주위 환경을 고려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는 주위의 도시환경과 건물의 관계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예를 들면 산필리포네리 교회의 종탑 정면은 거기까지 뻗어 있는 거리가 그곳에서 끝남을 보여주는 기념비와도 같이 설계되어 있다.
후기활동과 후대에의 영향
후기에 들어서도 보로미니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열적·근본적으로 건축 양식을 혁신시켰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콜레조 디 프로파간다 피데의 레마지 예배당을 만들었는데, 사다리꼴의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6쌍의 거대한 붙임기둥을 설계했다.
1660년대에 보로미니의 운명은 비참하게 기울어졌다. 그는 경쟁자인 베르니니의 명예와 성공에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의 유일한 제자인 프란체스코 리기와 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인 파드레 비르질리오 스파다는 모두 1660년대초에 죽었다. 나보나 광장에 있는 산아그네제인아고네 교회의 건축을 맡았다가 취소되었으며, 산안드레아델레프라테 교회의 건축도 중단되고, 산필리포네리 교회의 정면은 측면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볼품없게 되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다시 로마에 돌아오자 우울증이 재발되어 죽을 때까지 집안에만 박혀 지냈다. 보로미니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도면을 불태워버렸다. 병이 난데다가 심기증(心氣症)으로 인한 환각에 사로잡혀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국 발작을 일으킬 때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잠을 자야만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 밤, 편히 쉴 수도 없고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올라 칼을 찾아 자신의 몸을 찔렀다. 보로미니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그후 맑은 정신을 되찾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성찬식을 받고는 유서를 썼다. 그의 요청에 따라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마데르노의 무덤에 익명으로 묻혔다. 지금까지는 보로미니의 자살이 점점 심해진 정신분열증의 결과이며 그의 건축에는 이 병의 진행과정이 반영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확실한 자료는 없다.
그의 생애는 말년에 그가 현실에 환멸을 느낄 때까지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간과 빛을 건축의 구성요소로 다루기 위하여 제한적·폐쇄적인 성질의 벽을 거부한 점에서 보로미니는 가장 완벽하고 강력하게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많은 설계가들이 이러한 혁신적인 유산을 이어받았다. 처음부터 로마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던 보로미니의 작품은 다음 세기의 전과정에 걸쳐 이탈리아 북부와 유럽 중부에서의 건축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뒤 신고전주의 양식이 지배하게 되자 그는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보로미니의 건축 양식은 19세기 내내 대체로 잊혀져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그의 뛰어난 창작품들이 다시 인정받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화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