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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698~926년의 220여 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나라.
발해사 연구는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건국자·영역·사회구성과 같은 기초적인 분야부터 한계가 있다. 이승휴(李承休)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將)으로 단정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 본 이래, 유득공(柳得恭)·정약용(丁若鏞)·한진서(韓鎭書) 등 역대 사가들이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했다.
조선시대의 일부 성리학자와 실학자 중에는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에 회의를 표명한 경우도 있으나, 이후의 대체적인 흐름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유득공이 〈발해고 渤海考〉에서 제시했던 '남북국시대론'이 일반화되고 있다. 발해를 북국으로, 통일신라를 남국으로 설정하는 남북국시대론은 북한의 역사서에서는 수용되고 있으며, 남한의 주요역사서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대조영을 말갈계의 인물로 보고, 주민의 다수가 말갈족임을 들어 발해를 만주인의 왕조로 본다. 이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분리시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만주사로 정리하려 했던 만선사관의 영향 때문인데, 최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발해 영토의 일부였던 연해주 남부를 차지한 소련에서는 발해가 문화면에서는 고구려·신라와 가까우나 지배세력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이었다고 하여 발해사를 자국의 지방사·소수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하려 하고 있다. 한편 옛 발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중국은 발해는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고 여타의 말갈족들과 읍루(邑婁)·부여·예맥(濊貊)·옥저 계통의 여러 종족, 고구려유민 등이 이에 합류해 세워진 나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발해 멸망 후 주민의 대부분이 중국 각지로 옮겨가 한족(漢族)에 동화되었으므로 당나라 때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주된 시각이다. 이와 같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은 남북한을 비롯한 관련 국가들 사이에 역사적·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국사로의 편입 여부를 비롯한 발해사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사료 및 유적·유물의 발굴성과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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