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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698~926년의 220여 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발해의 통치 제도와 문화.
사회구성
발해는 고구려인·말갈족이 주체가 되어 만주일대의 여러 종족을 합쳐 세운 다민족국가였다. 일본의 역사서인 〈유취국사 類聚國史〉에 의하면, 발해는 토인으로 불리는 소수의 고구려계가 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말갈계의 주민이 피지배층의 다수를 점한 나라였다. 실제로 일본에 내왕한 사신과 그 수행원 가운데 말갈계로 보이는 만주식 이름을 사용한 인물은 수행원 6명뿐이었으며 정사·부사는 모두 고구려계가 사용하던 한족 성명을 썼음이 확인된다. 남송(南宋)의 홍호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는 발해의 유력한 성으로 고(高)·장(張)·양(楊)·두·오(烏)·이(李) 등을 들고, "부곡과 노비 및 성이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을 따른다"고 하여, 고구려계 및 소수의 말갈족을 지배층으로 하고 다수의 말갈족 및 기타 종족을 피지배층으로 하는 복합민족 국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립기의 이러한 종족적·계층적 구별은 점차 극복되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멸망과 함께 다수의 말갈계는 다시금 고유의 부락별·부족별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후에 여진인의 주체가 되었다. 발해인은 거란·고려·송 등으로 흩어져 그들의 일부로 동화됨으로써 소멸되었다.
행정제도
건국 당시의 대립기를 지나 당과의 평화관계를 수립한 후 고왕대부터 왕족·귀족의 자제들을 유학생으로 당에 보내 문물의 수용에 힘을 기울였다. 그결과 행정제도·도성건축·문화활동의 여러 측면에서 당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관제인 3성6부·1대7시·1원1감 제도는 당의 제도를 나름의 필요에 따라 구성한 것이며, 지방제도인 5경15부62주 제도, 부-주-현의 지방장관에 도독·자사·현승을 둔 것도 역시 당의 제도에 기초한 변형이다. 당의 6부에 해당하는 충·인·의·예·지·신의 6부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부의 주요기능과 구성 등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의 것을 따르되, 세부 운용에서는 필요에 따른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발해 | 당(唐)의 해당부 | 지사 | |
3성 | 선조성 | 문하성 | |
중대성 | 중서성 | ||
정당성 | 상서성 | ||
6부 | 충부 | 이부 | 작부 |
인부 | 호부 | 창부 | |
의부 | 예부 | 선부 | |
지부 | 병부 | 용부 | |
예부 | 형부 | 계부 | |
신부 | 공부 | 수부 |
5경 | 15부 | 참고 |
상경 | 용천부 | 숙신고지 |
중경 | 현덕부 | |
동경 | 용원부 | 예맥고지 |
남경 | 남해부 | 옥저고지 |
서경 | 압록부 | 고려고지 |
장령부 | ||
부여부 | 부여고지 | |
막힐부 | ||
정리부 | 읍루고지 | |
안변부 | ||
솔빈부 | 솔빈고지 | |
동평부 | 불녈고지 | |
철리부 | 철리고지 | |
회원부 | 월회고지 | |
안원부 |
산업경제
건국 초기부터 만주 동부지역 천연자원의 개발과 이용, 고구려 이래의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주변국과의 대외교역 확대를 통한 국력증대에 힘썼다. 발해에서 산출되는 명품 가운데에는 위성의 철, 현주의 포, 노주의 벼, 용주의 주(紬), 옥주의 면 등이 있었다. 위성은 중경현덕부내 철주의 수현으로 제철산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고구려의 발달된 기술을 이어받아 제철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으므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의 유민들을 요주를 비롯한 거란의 주요 철 생산지에 집단 이주시켜 제철업에 종사시켰다. 현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6주 가운데 수주로 두만강 하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해가 후당에 수출했다는 세포는 현주의 포였을 것으로 보이며, 발해 성립 이전 함경도지역에 있던 옥저의 특산인 맥포도 이 현주의 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벼로 유명한 노주도 중경현덕부 산하의 6주 가운데 하나로 하이란 강[海蘭河] 유역 평야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로 보아 중경현덕부에 속한 두만강 하류 일대는 벼·포·철 등이 모두 생산되는 경제의 중심지대였던 것 같다. 용주는 상경용천부에 소속된 주의 하나로 현재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닝안 현[寧安縣] 일대로 비정된다. 주(紬)는 면포를 가리킨다. 옥주는 남경남해부의 소속주 가운데 하나이다. 옥주의 면은 동예시대 이래의 양잠기술이 발해시대까지 계승되었음을 알려준다. 발해는 이와 같은 특산품들을 당·일본 등과의 교역물로 삼아 국부의 증대를 꾀했다. 대당 교역이 매우 활발해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통한 교역이 총 132회에 달했으며, 산둥의 등주와 청주에는 발해 사신을 위한 발해관이 설치되어 교역 중계지로서의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관사무역을 겸한 발해 사신의 빈번한 왕래는 대상국인 일본에 경제적 부담을 주어, 한때 일본은 대발해 교역의 제한을 시도하기도 했다. 신라도와 거란도를 이용한 대신라·거란 교역도 있었을 것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문화
통일신라와 함께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했던 발해의 문화는 나라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할 수 없었다. 전하고 있는 것은 한문으로 씌어진 외교문서, 약간의 산문, 몇 편의 한시, 문왕의 딸 정효공주묘에서 발견된 정효공주와 정혜공주비문 정도밖에는 별다른 문헌자료를 남기지 않아 역사뿐 아니라 문화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한국 문헌이 아닌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주로 전해질 뿐, 한국측 문헌에는 관련 기록조차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발해의 시인 가운데 이름과 자품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는 양태사·왕효렴·석인정·정소·배정 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것들이다. 따라서 고향을 그리는 시와 연회석에서의 의례적인 화답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보이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시상의 전개는 발해 시인들의 높은 경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김육불(金毓黻)의 〈발해국지장편 渤海國志長編〉에 실려 있다. 한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발해 역시 한문학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자를 빌려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건하고 활달한 기풍의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위에 수준 높은 당 문화를 접합시킨 특유의 힘있고 세련된 문화를 유적과 유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경이 있던 동경성 유적의 발굴시 출토된 대형 석등과 치미, 귀면와, 순금제 허리띠 등은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발해는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적 종교였던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상경·동경 등 주요도시의 유적에서 여러 개의 절터가 발견되었고,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다수의 불상이 수습되었다. 또한 제3대 문왕의 존호는 불교적인 '대흥보력효감금륜경법대왕'이었으며, 대당 사절과 대일본 사절 가운데에는 승려들이 동행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편 상경유지에서는 해독이 되지 않는 문자류가 새겨진 기와편이 다수 수습되었는데, 이것이 발해 문자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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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발해의 제도와 문화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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