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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당시 대두되기 시작한 민족협동전선론 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독립운동이 전선통일하는 데에 기여했다. 1926년 민족주의 계열과 좌파는 논의를 거쳐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진행하게 되었고, 상하이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독립운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독립운동가 안창호 역시 이 시기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창립했다. 이후 연합회가 결성되는 등 민족유일당운동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듯 했으나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가 발표되면서 1929년 좌파세력에 의해 상해촉성회가 해체되면서 나머지도 함께 사라졌다.
1920년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유일대당 수립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이하 촉성회)는 중국에서 조직된 민족유일당운동단체이다.
이는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민족협동전선론과 비타협주의에 기초하여 조직되었는데, 특히 1924년 1월에 이루어진 제1차 국공합작은 유일독립당운동,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5년 5월 베이징[北京] 방면의 유학생 조직에서 민족협동전선 결성 주장이 나왔다.
임시정부 쪽에서는 박은식(朴殷植)이 1925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을 통해 전선통일을 촉구하는 유언을 남겼고, 좌파세력은 1926년 2월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주의자동맹'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민족협동전선은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이루어 강력한 정부를 유지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계열과, 세력이 약한 처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민족해방을 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좌파의 요구가 서로 합치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3·1운동 후 자치론을 주장하는 타협주의자들이 대두했는데,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계는 타협주의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했다.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조상섭(趙尙燮)·오영선(吳永善) 등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26년 7월 안창호(安昌浩)는 주의 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통일노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창호는 베이징에서 좌파세력의 대표인 원세훈(元世勳)을 만나 각지에 먼저 세포조직을 설치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대독립당을 결성하는 방법에 합의를 보고, 10월 16일에 선언서를 발표하여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이하 북경촉성회)를 창립했다. 상하이에서도 김구가 1927년 2월에 이당치국 형태를 도입한 개정헌법을 발표했다. 개정헌법의 제2조 단서에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제49조에는 "헌법의 개정도 동종의 당이 완성될 때는 그 당에서 한다"라고 규정했다. 이 개헌은 독립운동계 전체에 일고 있던 전선통일의 노력을 정부차원에서 수렴하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 1927년 4월 15일 좌우세력의 대표인 홍진·홍남표(洪南杓) 두 사람의 이름으로 '전민족 독립당결성의 선언문'이 발표되고, 한국유일당의 조직을 촉성할 것 등의 강령을 결의하고 상해촉성회를 조직했다. 1927년 5월 의열단이 '독립당촉성운동선언'을 발표해, 종래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일된 당 조직의 방법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며 촉성회의 형식으로 통일적 중추기관, 즉 대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1927년 3월 이후 광둥[廣東]·우창[武昌]·난징[南京] 등에 촉성회가 성립되었다.
각지의 촉성회가 조직된 뒤, 다음 단계는 연합회를 결성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27년 11월 9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개최하여, 대한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대한독립당 광동촉성회, 한국유일독립당 무한촉성회,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연합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들어서서 전선통일의 기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27년 7월 13일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이 무너지고 12월의 광저우 사변[廣州事變]으로 한국인 공산당원이 상하이로 도피하면서 좌파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민족주의 세력을 압박하면서 임시정부 및 기타 여러 단체를 통일하여 공산제하의 대단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촉성회도 독립운동을 위해서 결집한 조직이라는 당초의 목표와는 달리 분열되기 시작했다.
특히 1928년 발표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는 민족협동전선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일국일당 원칙과 민족주의와의 합작을 폐기하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좌파세력은 1929년 10월 26일에 일방적으로 상해촉성회의 해체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서 유호한국독립운동자연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聯盟)을 창립했다.
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나머지 각지의 촉성회도 함께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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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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