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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 3. 18, 잉글랜드 워릭셔 버밍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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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 11. 9, 햄프셔 리딩 근처 헤크필드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총리(1937. 5. 28~1940. 5. 10).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정치가 조지프 체임벌린의 아들이며, 오스틴 체임벌린 경의 의붓동생이다.
바하마 제도의 앤드러스 섬에 있는 아버지의 사이잘삼(sisal) 농장을 경영했고, 버밍엄에서 금속세공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15년 버밍엄 시장으로 선출된 그는 1916년 당시 영국에서는 유일하게 시영 저축은행을 만들었다. 1916년 12월 그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제1차 세계대전 연립정부의 병무청장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자 1917년 8월 사임했다. 1918년 12월부터 하원의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체신국장(1922~23), 육군 경리감(1923), 보건장관(1923, 1924~29, 1931), 재무상(1923~24, 1931~37)을 역임하고 1937년 5월 28일 총리가 되었다.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독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따라 1938년 4월 16일 그는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이탈리아가 깊이 개입하고 있던 스페인 내전(1936~39)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또한 며칠 후인 4월 25일 영국의 방위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들을 포기했다.
1938년 9월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양도할 것을 체코슬로바키아에 요구함으로써 전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체임벌린은 전쟁발발을 막아보기 위해 독일로 갔다. 9월 30일 조인된 뮌헨 협정에 따라 그는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함께 히틀러의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영광스러운 평화'(이전에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되풀이했던 구호였음), '우리 시대의 평화'를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시 영국의 재무장을 가속화할 것을 명령했다.
1939년 3월 10~16일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자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을 포기했다. 또한 그는 유사한 공격이 일어날 경우 폴란드·루마니아·그리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보장하는 영국-프랑스 협약을 공표했다. 1939년 4월 그는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평화시에 징병제를 실시했다.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체임벌린의 구상, 즉 영국·프랑스·소련 간의 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려는 그의 시도를 좌절시켰으며, 이에 따라 8월 24일 영국은 영국-폴란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체임벌린은 9월 3일 영국의 전쟁참여를 반대했다. 그는 산발적인 군사행동이 일어나는 '엉터리 전쟁'(phony war) 기간에도 여전히 총리직에 남아 있었는데, 당시 전시내각, 특히 초대 해군장관이었던 처칠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이었다.
1940년 4월 영국군의 노르웨이 원정이 실패로 끝난 이후 보수당 하원의원의 지지를 상당 부분 상실한 체임벌린은 같은 해 5월 10일 독일이 베넬룩스 지역을 침략하자 사임했다. 그는 처칠의 연립정부에서 1940년 9월 30일까지 자문위원회 의장으로서 충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의장직과 보수당 지도부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몇 주일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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