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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이븐 투글루크

다른 표기 언어 Muhammad ibn Tughluq
요약 테이블
출생 1290경, 인도 델리
사망 1351. 3. 20, 손다
국적 델리

요약 인도 델리 술탄국 투글루크 왕조의 2번째 술탄(1325~51 재위).

그의 재위기간에 델리 술탄국은 잠시 동안이나마 북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치할 수 있었다.

행정상의 실수를 저지르고 적에게 지극히 가혹했기 때문에 결국은 인도 대륙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고, 통치 말년에는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는 코란, 이슬람 법률학, 천문학, 논리학, 철학, 의학, 수사학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321~22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데칸의 와랑갈 도시와의 전투에 내보냈는데, 이 전투에서 그는 초반의 전세를 역전시켜 반역한 힌두 라자(首長)들을 진압했다.

1325년 권좌에 올라 1351년 죽을 때까지 무하마드는 22번이나 반란세력과 싸우면서 그의 정책을 지속적이고 무자비하게 밀고 나갔다. 17년간이나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상담역이었던 지야 웃 딘 바라니는 종종 그에게 퇴위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이 조언을 무시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이슬람 성직자들인 '울라마'와 금욕적 신비주의자들인 '수피'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다.

울라마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몇몇 선임 술탄들이 했던 것처럼 이들의 신분을 다른 일반 시민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해 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려 했다. 또한 무하마드는 수피들의 명성을 이용해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들 수피는 정부와의 어떠한 접촉도 거부했으며,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어떠한 보조금이나 관직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무하마드는 회유, 강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들을 자신의 정치 들러리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이들을 괴롭혀도 그들은 끝까지 그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그들을 북부 인도의 도시에 뿔뿔이 흩어지게 했을 뿐이었다.

4쪽으로 된 그의 자서전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무하마드의 유일한 저작인데, 여기서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정통 교설과 철학적 회의 사이에서 동요했으나 결국 이성적인 신념에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철학적인 회의를 풀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카이로의 칼리프에게서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시켜주는 만슈르(왕위권)를 얻어냈다.

1327년 수도를 데오기르(지금의 다울라타바드)로 옮긴 것은 인도 남부의 광활한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는데 델리 시민들은 어느 정도 강제로 데오기르로 이주해야 했다.

행정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수도 이전은 실패였지만 넓은 지역에 문화적인 영향을 끼쳤다. 데칸에서 우르두 언어가 퍼진 것은 이러한 이슬람교도의 대거 유입 때문이었다. 무하마드는 여러 번 화폐제도를 개혁했는데, 그가 주조한 주화는 기술과 금속의 순도(純度)뿐 아니라 모양에서도 선대 왕들이 만든 주화를 능가했다.

그러나 은화와 동등한 액면 가치를 가지면서 질 낮은 금속으로 만든 대용화폐 제도의 도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호라산 정벌계획은 한 번도 실행된 적은 없지만 서부 국경의 방어력을 좀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카라질(가르왈쿠마온) 원정(1329~30)은 중국이 지배하고 있던 북쪽 고원국들과의 국경 분쟁을 평정하려는 시도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 중국과 델리 사이에는 밀사들의 내왕이 있었다.

서북부 인도의 히말라야 기슭에 있는 나가르코트 정복은 무하마드의 국경지역 안정화 정책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1328~29년 무하마드가 갠지스 강과 줌나 강 사이에 있는 도아브의 토지세를 올리자 심한 가뭄 등이 겹쳐 납세자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무하마드는 최초로 윤작을 도입하고 국영농장을 건설했으며, 경작에 관심을 쏟고 농업부를 두어 관개시설을 개선했다. 북인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1338~40) 자신의 거처를 스와르그다와리로 옮겨 몸소 흉년구제대책을 강구했다.

타기 반란을 진압하려던 무하마드의 마지막 원정은 1351년 신드의 손다에서 그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는 죽을 때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이 지은 시구(詩句)를 중얼거렸다. 그당시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했다. "술탄은 인민에게서 자유롭게 되었고, 인민은 술탄에게서 자유롭게 되었다."

무하마드 이븐 투글루크에 대한 평가

무하마드는 14세기 인물 가운데 가장 논란의 소지가 많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였다. 용감한 군인이었던 그는 종교적으로 관대하고 평상시에는 인간미가 넘치고 소박했으나, 종종 잔인하고 거의 야수에 가까운 심성으로 바뀌곤 했다.

그는 일생 동안 믿음과 실천의 갈등 속에서 살았다. 이때의 믿음이란 바로 자기 정책의 정확성과 이 정책을 수행하는 수단에 대한 믿음이었다. 타고난 혁명가였던 그는 이슬람교를 착취의 수단이 아닌 봉사의 종교로 만들어 이를 통해 더욱 공평한 사회질서를 만들려고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바탕을 두고 가난한 자, 학자, 신앙심이 깊은 자들을 후원하며, 전통에 얽매인 사회의 특권계급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권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의 역사가들은 그의 행정조치를 근거로 그를 평가했는데 그 조치는 잘못되지도, 허무맹랑하지도 않았다. 무하마드의 행정 조치들은 대부분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지나치도록 엄격하게 이 조치를 시행했고 이러한 행정 조치들이 특권계급에 대한 도전이 되었으며 또 백성들은 전반적으로 무기력하고 보수적이었고 무하마드의 행정기관이 영토확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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