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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세채의 학문은 당쟁의 격화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의 동요하는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당쟁의 근절을 위한 탕평론과 사회적 규범의 확립을 위한 예학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소론의 영수가 되었지만, 붕당의 화가 나라의 존립에 영향을미친다는 인식에서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론을 제시했다. 노론·소론의 대립과정에서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을 발표한 것은 그러한 예였다.
한편 그의 학문적 업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학은 양란 이후 심화된 조선왕조의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인 강상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당쟁과 관련되면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예송(禮訟)의 문제는 이러한 입장에서 예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였다. 즉 성리학의 심화과정에서 예의 의식적·자율적인 준행을 강조하는 추세와 함께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 도통 수호와 이적 배척 및 강상의 재건이 필요해진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세채가 도통수호를 위해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 등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현들의 도학 연원을 밝히고, 이단을 비판·배척하기 위해 〈양명학변 陽明學辨〉·〈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 등을 저술하여 양명학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했던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의 예학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예에 대한 관심과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가례식(家禮式)의 사례에 관한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가례요해〉·〈가례외편〉·〈남계예설〉 등 숙종 때에 편찬된 그의 예서는 주로 관혼상제의 사례에 관한 것들이었다. 또 〈소학〉·〈근사록〉·〈대학〉·〈중용〉 등 유교경서의 난해한 구절을 해설하는 한편 정주(程朱)의 해설을 토대로 〈춘추〉를 보완·서술하기도 했다.
박세채의 저술은 그의 유학사·정치사의 위치를 대변하듯이 실로 방대하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범학전편 範學全編〉·〈시경요의〉·〈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심경요해 心經要解〉·〈학법총설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심학지결 心學至訣〉·〈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육례의집 六禮疑輯〉·〈삼례의三禮儀〉·〈사례변절 四禮變節〉·〈가례요해〉·〈가례외편〉·〈남계예설〉·〈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 등이 있다.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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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박세채의 학문과 사상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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