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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쾨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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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텐의 궁정 악자으로서 주로 실내악과 관현악에 전념했다. 몇몇 작품들은 이전 것을 나중에 개작한 것이지만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비올라 다감바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들과 무반주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작품들은 이 무렵에 작곡된 것이었다.

1721년 3월 24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완성되었고, 그 중 6번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대공의 기교적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대공의 생일과 그밖의 여러 행사를 위한 칸타타 몇 곡을 작곡했으나 지금은 보다 일반적인 가사로 바꾼 후기의 개정판만이 남아 있다.

바흐는 쾨텐에서 건반악기 교재 음악도 작곡했는데 W. E.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Clavierbüchlein〉(1720. 1. 22 시작), 〈프랑스 모음곡 French Suites〉의 일부, 〈인벤션 Inventions〉(1720),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1722)이 있다.

1720년 7월 8일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갑자기 죽었다. 바흐는 이듬해 12월 3일 바이센펠스의 트럼펫 연주자의 딸인 안나 마크달레나 빌켄과 재혼했다. 첫번째 부인의 죽음을 제외한다면 쾨텐에서의 첫 4년 동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대공은 진실로 음악을 이해했고 바흐는 그러한 대공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한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그러나 1721년 12월 11일, 대공이 결혼을 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대공비는 남편이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했고 바흐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1710년과 1714년에 각각 태어난 두 아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요한 쿠나우의 죽음으로 음악감독 자리가 비게 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는 이미 바흐의 친구인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다시 당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며 다름슈타트의 음악감독이었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에게 제안된 상태였다. 그라우프너가 그 요청을 받아들일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는 1723년 2월 7일 칸타타 22번 〈예수께서 12사도를 이끄셨도다 Jesu nahm zu sich die Zwölfe〉를 시연했다.

그러나 4월 9일 그라우프너가 초청을 정식으로 거절했을 때는 이미 라이프치히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4월 4일에 그와 대공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대공비가 죽었지만 그는 쾨텐을 떠나 5월 13일 라이프치히에 부임했다. 그 후 그는 쾨텐의 명예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그의 부인은 1728년 11월 19일 대공이 죽을 때까지 때때로 그곳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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