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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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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바스크족은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사는 소수민족이다. 신체적으로는 서부 유럽의 다른 민족들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으나, 사용하는 언어인 바스크어는 인도유럽어와 공통점이 없다.
주로 온화한 기후의 다습한 고지 삼림지대에 거주하면서, 전통적으로 저지대의 토지를 개간하고 경사지에서 기른 풀을 베어 소를 사육했다. 또한 바다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신대륙 정복자와 함께 신세계를 식민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옛날부터 강한 민족적 연대감을 형성해왔으며, 민족의 전통법인 푸에로스를 지켜왔다. 자신들의 자율적 지위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어, 스페인 공화국 건립 이후 지속적으로 바스크 지역의 해방과 분립운동을 펴왔다. 따라서 바스크족은 현재까지도 대다수 스페인인들과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말 약 85만 명이 스페인에, 13만 명이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17만 명이 유럽을 떠나 남아메리카와 미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에서 이들의 거주지는 바스크 지방이라는 자치공동체(comunidad autónoma)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알라바·기푸스코아·비스카야(비스케이) 주가 포함되며, 나바라에도 바스크족이 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들이 피레네자틀랑티크 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거주지역은 비공식적으로 바스크 지방(Pays Basque)이라고 불린다(바스크어). 신체적으로 볼 때는 서부 유럽의 다른 민족들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지만 언어는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말이 아니다(→ 바스크어). 주로 온화한 기후와 습기가 많은 고지 삼림지대에 살고 있다.

철광맥이 많기 때문에 일찍부터 특히 선박제조업 같은 산업이 발전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저지대의 좁은 토지를 개간하고 경사지에서 기른 풀을 손으로 베어 소를 사육했다. 사과밭과 산양 방목장도 많다. 집촌(集村)의 형태는 띠지 않지만 농가가 모여 마을을 이루거나 경사가 완만한 지역에 산재해 있다. 전에는 각 가정(집·농장·가족을 포함)이 1명의 상속인에게만 재산을 상속하는 전통적인 상속법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바스크 문화는 카세리오(caserío)라는 개별적인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계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혈연의식이 존재했다.

바스크족은 농사를 짓거나 배를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바다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신대륙 정복자와 함께 신세계를 식민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스케이 만의 고래 사냥과 뉴펀들랜드 근해의 대구 어업을 최초로 시작했다. 이들은 강한 민족적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밀수업에 종사해왔다.

10세기까지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로마 가톨릭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바스크 민담 속에는 여전히 애니미즘이 남아 있다. 전통적인 바스크 문화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쇠퇴했으며, 프랑스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카세리오의 인구 역시 크게 줄었다. 산업화된 곳에서는 바스크적인 관습뿐만 아니라 바스크 언어도 사라졌다. 고립된 내륙 산간지역에서는 바스크어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나 원칙적으로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바스크족의 초기 역사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로마의 기록 중에는 바스코네스족이 대체로 오늘날의 나바라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았다는 대목이 있다.

이들은 서(西)고트족·프랑크족·노르만족 등과 싸웠으며 때로는 에브로 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무어인과도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에 나오는 778년의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샤를마뉴의 후위대를 격파한 것은 무어인이 아니라 바스크족이었다. 바스크족 영토는 10세기경 나바라 왕국에 병합되었으며 중세의 정치적 혼란이 끝날 무렵에는 알라바·비스카야·기푸스코아 주 등이 카스티야·아라곤과 병합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이들은 상당한 지역적 자율성을 확보했으며 교역·납세·군복무 등에 있어서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은 대중적 결사 권리와 상속규칙을 결정하는 바스크의 전통적인 법, 즉 푸에로스(또는 포르스)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바스크족은 자신들의 자율적 지위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에서 자신들의 지역적 특권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자 1830년대에 스페인 왕위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왕권찬탈자 돈 카를로스의 봉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난 패배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대에 카를로스 지지자들의 봉기를 지원했으나 실패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부의 보복으로 결국 푸에로스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지역적인 자율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다.

1931년 스페인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들의 정치적 견해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기푸스코아·비스카야·알라바의 일부 바스크족은 스페인 공화국 안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이라도 얻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스페인 정부가 반(反)가톨릭 정책을 펴고 있는데도 공화국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나바라 지역에서는 공화국의 붕괴를 기대하며 1936년 민족주의 반란을 일으켰고 카를로스파 군대의 일부를 구성했다. 언제나 반(反)카를로스적인 자유주의의 요새였던 빌바오 시는 공화국 정부와 바스크 민족주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비스카야 주의 의회 중심지이자 바스크족의 상징이었던 게르니카를 1937년 9월 독일 공군이 폭격할 때까지 이러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부가 바스크족의 많은 사람들의 특권들을 폐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망명했다(제2공화국). 프랑코 사후 1975년 자유주의적인 군주제가 성립되자 바스크족이 지역적 자율성 확보를 위한 시위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1978~79년에는 스페인 정부가 이를 어느 정도 허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와 자치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바스크어로 '바스크의 조국과 자유'라는 뜻의 에테아(Euzkadi Ta Azkatasuna/ETA)와 같은 강경 군사노선을 따르는 더 투쟁적인 분리주의자들은 바스크족의 자주권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를 촉구하는 해방운동을 펴고 있다. 따라서 바스크족은 대다수 스페인인들과 아직도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바스크 깃발

ⓒ Frankie688/wikipedia | CC BY-SA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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