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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불가리아 동부, 흑해 연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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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334,762명 (2022년 추계) |
면적 | 154,236㎢ |
대륙 | 유럽 |
국가 | 불가리아 |
요약 불가리아의 항구도시. 불가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북쪽 해안에는 드루슈바·즐라트니퍄슈치·알베나·발치크 등 유명한 휴양도시들이 있으며 이중 발치크는 한때 로마의 왕족과 귀족들의 여름휴양지였다. 바르나는 BC 6세기에 밀레토스를 근거지로 했던 그리스인들이 오데소스라는 이름으로 세운 도시로, 1391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 이 도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후 그리스 해방전쟁중이던 1828년에 러시아에 점령당했고, 이들이 퇴각한 후에 다시 투르크령이 되었다.
불가리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흑해 연안의 바르나 만(灣) 북쪽 해안을 배경으로 해발 300m 남짓한 도브루잔스코 고원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프로바디스카 강이 흘러들면서 형성된 바르나 호(湖)와 흑해는 좁은 운하(1907 완공)로 연결된다. 정치·경제·문화·휴양 중심지이며 현대적 도시로 가로수 길이 넓게 나 있으며 넓은 해안가에는 잘 꾸며진 공원이 있다.
바르나의 북쪽 해안에는 드루슈바·즐라트니퍄슈치(황금의 모래사장)·알베나·발치크 등 유명한 휴양도시들이 있으며 이중 발치크는 한때 로마의 왕족과 귀족들의 여름휴양지였다.
바르나는 BC 6세기에 밀레토스를 근거지로 했던 그리스인들이 오데소스라는 이름으로 세운 도시이다. 트라키아·마케도니아·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681년 제1 불가리아 제국(679경~1018)으로 합병되었으며 이때 비로소 바르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반 아센 2세의 재임기간중(1218) 무역 중심지로서 제노바·베네치아·두브로브니크와 활발한 무역을 했다.
1391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 이 도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1444년 무라드 2세가 이끈 투르크군이 발칸 지방의 투르크인에게 마지막까지 대항해 싸우던 십자군을 전멸시킨 치열한 전투가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스 해방전쟁중이던 1828년에는 러시아에 점령당했으나 이들이 퇴각한 후에 다시 투르크령이 되었다. 1854년 크림 전쟁중에는 세바스토폴을 공격목표로 삼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기지역할을 했다. 1878년 투르크에게서 해방된 바르나는 베를린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로 넘어갔다.
1866년 루세-바르나 간의 철도가 건설되고 이어 1899년 소피아까지 노선이 연장되면서 도시는 더욱 팽창했다. 1906년에는 현대식 항구가 들어섰다(→ 베를린 회의).
바르나에는 국내 정기항공노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여름에는 국제선도 취항한다. 흑해 연안의 도시로 정기여객선과 버스로도 갈 수 있다. 2만t에 이르는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바르나 항은 불가리아 전체의 해상 및 하천 운송화물의 절반 정도를 처리하는 경유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주로 가축·곡물·가공식품류 등을 수출하며 제분업·조선업을 비롯해 전기기구·가전제품·섬유·디젤엔진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과수원과 포도원이 많으며 포도주를 생산한다.
대학교, 해군사관학교, 의과대학, 박물관, 극장, 오페라 극장, 미술관과 해양·어업 연구소 등이 있다. 5, 6세기 무렵 세워진 바실리카가 남아 있어 고대 제노바 식민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도시 북쪽에 있는 알라자 수도원은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4세기에 세워졌는데, 이 수도원의 기도실과 예배당은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1949~56년 '스탈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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