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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바둑판은 네모꼴로 가로·세로 19줄 361점이다. 흑백으로 편을 나누어 361점 위 적당한 지점을 중심으로 서로 한 점씩 번갈아 진을 치며 싸워 그 차지한 점(집)이 많고 적음으로 승부를 가린다.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만은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각각 어리석은 아들의 머리를 깨우치려고 바둑을 창안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이 있으나 믿기는 어렵다. 한편 고누와 같은 단순한 놀이가 오랜 역사발전과 더불어 개량·보완·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점을 치기 위한 도구 또는 천문관측과 초기 음양오행설의 소박한 도표가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변질·발전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우리말인 '바둑'을 지방에서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배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배자의 '자'(子)는 돌, 독으로 배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한 것이 아니겠냐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신라시대부터 써내려와 순수한 우리말이 되었다고 한다.
바둑판은 네모꼴로 가로·세로 19줄 361점이다. 흑백으로 편을 나누어 361점 위 적당한 지점을 중심으로 서로 한 점씩 번갈아 진을 치며 싸워 그 차지한 점(집)이 많고 적음으로 승부를 가린다.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만은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설문 說文〉·〈박물지 博物誌〉·〈태평어람 太平御覽〉 등에 따르면 4,000여 년 전 요(堯)나라 임금과 순(舜)나라 임금이 각각 어리석은 아들 단주와 상균의 머리를 깨우치려고 바둑을 창안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이 있으나, 오묘 무궁한 바둑 원리를 단순사회인 상고시대에 창작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 고누와 같은 단순한 놀이가 오랜 역사발전과 더불어 개량·보완·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점을 치기 위한 도구 또는 천문관측과 자연연구에 따른 초기 음양오행설의 소박한 도표가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변질·발전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바둑을 뜻하는 고대의 중국 개념은 '혁'(奕)이었고, '기'(棋)는 두는 용구를 뜻했고 다시 혁이 기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위기'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일본용어인 '고'[碁]나 '이고'[圍碁]는 중국명칭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말인 '바둑'을 지방에서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순장 포석을 '배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화점 위에 놓인 '기자' 곧 바둑울 뜻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배자의 '자'(子)는 돌, 독으로 배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한 것이 아니겠냐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신라시대부터 써내려와 순수한 우리말이 되었다고 한다.
순장바둑
조선시대의 바둑은 기본원리에서 현대와 다름이 없으나 포진을 미리 해놓고 직접 전투로 들어가는 형식상의 특징이 있었다. 이런 형식을 순장이라고 하는데 순장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이 순장바둑은 한일합병 뒤인 1912년을 전후해 첫점부터 포석을 하는 이른바 일본바둑에 밀려났다. 순장바둑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둑판의 화점표시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꽃술 무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래
중국에서 발생한 바둑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대개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중 도림이 백제에 숨어들어가 개로왕을 바둑으로 현혹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수도를 광주에서 공주로 옮기게 했다는 전설은 사기(史記)에 근거를 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34대 효성왕이 바둑을 매우 애호하여 당나라에서는 외교사절을 신라에 보낼 때는 반드시 이름 높은 문인과 바둑의 명수를 수행케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경상남도 가야산 바위 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신라시대 때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로 넘어와서는 귀족계층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의 대문호인 이규보의 시문에는 바둑을 소재로 한 것이 많고, 당시의 묘지 비석에 바둑 이야기가 쓰인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둑으로 도박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중국의 무역상에게 아내를 잃고 슬퍼한 고려가사 〈예성강곡 禮成江曲〉은 가사는 전해지지않으나 〈고려악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바둑의 쇠퇴기로 볼 수 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유교였고 혁명주체 세력들은 고려 말엽의 부패와 혼돈에 바둑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부터 궁정과 귀족사회에 다시 퍼져 차츰 일반인에게 까지 보급되었다. 임진왜란의 명장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대국했을 정도로 명수였고 이충무공도 싸움터에서 짬짬이 바둑을 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한말에는 김만수라는 명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는 백남규·노사초가 국수의 명맥을 유지했고, 해방 후에는 일본기원에서 수업한 조남철 초단이 현대 한국바둑의 초석을 닦으면서 1955년 사단법인 대한기원(지금의 한국기원)이 발족되어 본격적인 부흥작업에 들어갔다. 1962년에는 바둑전문잡지 〈기원〉이 개인의 손으로 창간되었고 1967년 한국기원에서도 〈월간바둑〉을 창간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입단제도
1954년에 전문기사를 배출하기 위한 입단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다. 제1회 입단대회에서는 김태현만이 참가해 부전승으로 입단했다. 그로부터 65회에 걸친 입단대회를 거쳐오는 동안 112명으로 불어났다. 1992년 10월 현재 9단 7명, 8단 5명, 7단 15명, 6단 15명, 4단 18명, 3단 11명, 2단 13명, 초단 17명, 객원기사 2명, 이밖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사가 5명 있고 이중 여성 기사(전원 초단)가 6명이다. 해방 이후 한국 바둑계의 흐름을 크게 나누어보면 조남철·김인·조훈현·서봉수를 거쳐 이창호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바둑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날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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