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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더

다른 표기 언어 Sir Halford John Macki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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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1. 2. 15, 잉글랜드 링컨셔 게인즈버러
사망 1947. 3. 6, 도싯 파크스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지리학자.

교육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세계를 두 지역으로 구분하는 지정학적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의 발전된 지역을 '심장지대'(heartland)라 하고 그외 종속적 지위를 가진 대륙지역을 '주변지역'(maritime lands)이라고 구분지었다. 1920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스코틀랜드계 물리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매킨더는 1880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크라이스트처치에 들어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그는 특히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1883년 수석으로 졸업했고 그 이듬해에는 현대사 부문을 2등으로 마쳤다. 또 그 대학의 주요한 토론모임인 '옥스퍼드 협회'(Oxford Union)의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옥스퍼드를 떠난 뒤에는 런던 소재 법과대학 중 하나인 '이너템플'(The Inner Temple)에서 법학 공부를 해 1886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옥스퍼드 확장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특히 영국 북부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신(新)지리학'이라고 부르던 것을 강의했다. 이 확장운동은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교육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신지리학이란 지리학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교량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그는 이 새롭고 명쾌한 개념을 통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저서 〈영국과 영국해 Britain and the British Seas〉(1902)는 그가 확신을 가지고 독특한 문체로 쓴 작품으로 영국 지리학사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당시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회원들은 지리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고자 애쓰면서 교육체계 내에서도 지리학이 충분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매킨더의 성공을 알게 된 회원들은 그를 초빙해 신지리학에 대한 강연을 하도록 했다.

그는 '지리학의 영역과 방법'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매우 설득력있게 발표했으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1887년 매킨더는 옥스퍼드의 지리학 강사가 되었는데 이렇게 강사로 임명받은 것은 영국의 대학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1899년 왕립지리학회와 옥스퍼드대학교가 함께 옥스퍼드 지리학회를 창설했을 때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매킨더는 바로 그해에 동부아프리카 탐험대를 조직해 최초로 케냐 산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상식적으로 지리학자라면 '탐험가이자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매킨더는 그뒤로도 레딩과 런던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1904년까지 옥스퍼드에 계속 재직했다. 1904년 런던대학 부설 '런던정치경제대학'의 회장이 되어 4년 동안 학회와 대학을 관리하는 데 정열을 쏟았다. 그는 대학본부가 런던 대도시권의 주변부가 아닌 런던 중심부 블룸스베리에 세워지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8년 동안 경제지리학 강사로 계속 일했지만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3번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즉 1910년 글래스고 캄라치 구를 대표하는 통일당원(보수당원)으로 의회에 들어간 것이었다. 제국주의적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했던 그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우 모임을 가졌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치가인 L.S. 애머리와 제국행정가인 로드 밀너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의회에서 그가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1918년 보통선거에서 그는 상대편을 뻔뻔스러운 '러시아 볼셰비키 옹호자'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선되었지만, 1922년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매킨더는 안정적인 평화정착의 전제조건을 연구하면서 정치지리학 논문을 썼다. 이미 1904년에 왕립지리학회에서 초본의 개요를 밝힌 바 있는 이 논문 〈역사의 지리학적 중심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을 통해, 그는 아시아 내륙과 유럽이 심장지대로서 '세계 섬'(world Island)의 전략적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육지의 세력에 대항하는 해상세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며 또 시베리아 남부가 경제와 산업의 발달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다 진전된 견해는 소책자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1919)에 피력되었는데, 이 책이 출판된 1919년초 당시에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국제연합의 역할이 심장지대의 지배를 둘러싸고 다투는 세력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간 안정화 요소를 제시했는데, 이는 독일과 러시아가 분리되도록 두 나라 사이에 일련의 독립국가들을 세운 뒤 평화조약을 강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덮어두더라도 그 내용 중엔 많은 선견지명적 관찰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에 대한 주장이나 약소국들의 지역적 조직의 필요성을 논한 주장 등이 그렇고, 또 패전국 독일에서는 혼란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독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경고 등이 그렇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미국에서 더 관심을 끌었다. 한편 이와 관련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발생했다. 즉 독일의 지정학자 칼 하우스호퍼가 세계 섬을 지배하려는 자신의 야심만만한 계획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장지대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매킨더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하우스호퍼를 통해 히틀러에게 영감을 준 셈이 되었다. 냉정한 시각으로 평가할 때 이 논문은 비록 그 관점이 발전되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어도 세계 전략에 관한 주요한 관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1924년 그는 대서양공동체에 대한 예언적 이론을 책으로 펴냈다.

대서양공동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침내 실현되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군사력을 장악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킨더의 가설이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설을 통해 서부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 중심부의 세력을 상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두 지역은 "많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간 단일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매킨더는 벨라루스 군대를 합병하기 위한 영국 최고사절로 남부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1920년 영국으로 돌아와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23년 학문의 길을 마감한 그는 1920~45년 제국 선박위원회 의장으로, 1926~31년에는 제국 경제위원회 의장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1926년 명예직인 추밀고문관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받은 여러 개의 훈장들 가운데에는 1946년 왕립지리학회가 수여한 후원자 훈장과 1944년 미국 지리학회에서 받은 찰스 P. 데일리 훈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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