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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 8. 13, 키프로스 파포스 파노파나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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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7. 8. 3, 니코시아 |
국적 | 키프로스 |
요약
키프로스 정교회의 대주교·수석주교.
본명은 Mikhail Khristodolou Mouskos.
전후 영국 점령 기간 동안 그리스와의 통일운동을 지도했고, 1959~77년 죽을 때까지 키프로스 독립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가난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나 키프로스에서 공부한 뒤 아테네대학교와 보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94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1948년 키티온(라르나카)의 주교가 되었으며 1950년 10월 18일 대주교가 되었다.
대주교로 있는 동안 그리스-키프로스 통일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그것은 터키 점령 기간 동안 키프로스 대주교가 전통적으로 민족의 수장, 또는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법과 질서, 국민의 복지를 책임졌기 때문이었다(→ 분봉왕).
그는 키프로스 섬에 사는 상당수의 터키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분할을 주장하는 터키 정부의 압력과 독립하거나 영국연방으로 남으라는 영국 정부의 제안에 반대하여 그리스의 총리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를 만났으며(1954. 2),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통일에 대한 그리스 정부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에 영국 정부는 그가 게오르기오스 그리바스 대령이 이끄는 테러 단체의 중심인물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그는 무력보다 정치적 협상을 선택하여 1955~56년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은 실패로 끝났으며 그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1956년 3월 추방되었고, 게릴라들의 폭력행위가 시작되었다.
1959년 2월 마카리오스는 타협안을 받아들여 그결과 키프로스의 독립을 얻었고 1959년 12월 13일 터키인 부통령과 함께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12월 이후 마카리오스 행정부는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의 충돌로 극도로 약해졌으며, 그리스와 터키는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전에는 그리스인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그가 이제는 두 집단의 화합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었지만 터키인들이 계속 저항하자 결국 그는 1967년 12월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터키계 소수민족의 문제를 처리하는 터키계 키프로스 임시정부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지역분쟁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그는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 집단 사이에서 지방자치 문제는 여전히 교착상태로 남아 있었고 1972년과 1973년 키프로스 주교들이 마카리오스의 사임을 요구했지만, 1973년 그는 3선 대통령이 되었다. 1974년 7월 그리스 본토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그리스-키프로스 국방 경비대가 아테네에 있는 군사혁명 위원회의 모의로 그리스-키프로스 통일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마카리오스는 몰타로 탈출해 런던으로 갔으며,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북쪽에 있는 터키계 키프로스를 독립국가로 선포했다. 마카리오스는 그리스 군사혁명정부가 무너진 후인 12월, 키프로스 섬 분할에 반대할 것을 맹세하고 키프로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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