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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석불

다른 표기 언어 磨崖石佛 동의어 벼랑부처

요약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 아시아를 거쳐 육조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양식인데 우리나라 산악은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석굴을 만들기 어려워 바위면을 약간 파고 들어가 그곳에 불상을 새긴 불감의 형태나 노천의 마애불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마애불 중 오래된 것은 충주시의 마애불상군, 태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상, 경주 근교 단석산의 마애불상군 등이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의 경우 바위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서산마애삼존불은 바위가 차양처럼 나와 있으며, 단석산 마애불의 경우는 자연석실 안에 새겨져 있다.
이 상들은 대체로 6세기말이나 7세기초로 추정되는 것으로 마애석불의 시원을 이때쯤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많은 마애불을 볼 수 있는데 전국적인 확산분포와 대형화가 그 특징이다.

자연의 암산에 석굴을 파서 승원을 짓거나 탑당을 세우는 일은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 아시아를 거쳐 육조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며 윈강 석굴[雲崗石窟]과 룽먼 석굴[龍門石窟] 등은 그 예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이미 이러한 석굴사원의 조영을 알고 있었으나 중국과 달리 굴의 개착이 쉬운 사암이나 석회암보다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석굴의 개착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골굴암마애불상

골굴암마애불좌상, 암벽에 자연굴을 이용해 만든 12개의 자연석굴 가운데 하나(통일신라 후기), 보물 제581호, 높이 400cm, 경북 경주시 양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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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바위면을 약간 파고 들어가 그곳에 불상을 새긴 불감의 형태나 노천의 마애불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부 마애불의 경우는 목조가구를 설치해 보다 본격적인 석굴사원의 형식을 취했던 곳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마애불 중 연대가 올라가는 예로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의 마애불상군, 태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상, 경주 근교 단석산(斷石山)의 마애불상군 등이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의 경우 바위가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서산마애삼존불은 위에서 다른 바위가 차양처럼 나와 있으며, 단석산 마애불의 경우는 ㄷ자형으로 된 자연석실 안에 새겨져 있어서 모두 석굴을 염두에 두고 바위를 고른 것으로 보인다. 이 상들은 대체로 6세기말이나 7세기초로 추정되는 것으로 마애석불의 시원을 이때쯤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보다 본격적인 마애석불의 예는 경주 남산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불곡(佛谷)의 여래좌상을 위시해 탑곡(塔谷)의 사방불, 칠불암(七佛庵)의 마애삼존불, 삼릉곡(三陵谷)의 마애불, 약수곡(藥水谷)의 마애대불 등이 그 예이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많은 마애불을 볼 수 있는데 전국적인 확산분포와 대형화가 그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북한산 승가사의 여래좌상, 법주사의 여래의상, 대흥사 북미륵암의 여래좌상, 천안삼대리의 여래입상 등이다. 이 마애불들은 그 시원이 중국에 있다 할지라도 조각기법이나 표현의 독자성 등에서 한국적인 불상표현의 한 갈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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